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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시대, 어느 순례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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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국민일보| 작성일2020-07-21 | 조회조회수 : 3,30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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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월터 브루그만의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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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어두운 시간대에 살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매우 유동적입니다. 대규모 공포의 마성 군단이 지구를 침공하고 있습니다. 묵시론적 일들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생아실과 영안실의 거리는 문지방 하나 사이가 되었습니다. 6월 30일 현재 코로나 발생 현황을 보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세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는 1025만7907명, 사망자는 50만4613명입니다. 예를 갖춘 경건한 장례식은 이미 오래전 일들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두려움과 공포로 공황 상태가 되었습니다.

    홀연히 전 세계를 강타한 대재앙은 우리 삶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약한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어느 쪽으로 튈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뼛속까지 고통스레 느껴집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서서히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박사와 학자, 허풍 떨던 정치가와 유명인 모두 지푸라기처럼 허겁지겁 주저앉습니다. 인간의 허약성과 삶의 취약성을 온몸으로 전율하며 뼈저리게 느낍니다. 생명의 허망함과 삶의 덧없음이 공포와 두려움의 가면을 쓰고 시시각각으로 존재 자체를 짓누릅니다. 지구에 사는 독특한 종(種)으로서 우리 인류가 과연 존속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섭니다. 인류의 미래는 불안하고 위태합니다. 낙원에서 추방된 첫 부부가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갈 때 힐끗 뒤돌아보며 내뱉은 넋두리, “아아, 우리가 살던 곳이 낙원이었구나!”처럼. 이제 인류라는 종 자체가 실낙원의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인류는 얼마나 자만하고 교만했던가요.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위대한 제국들의 몰락들을 보았습니다. 냉전 시대를 종식하고 인류는 평화를 구가하며 물질 만능의 신을 주신(主神)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영원의 영역인 하늘을 쟁취할 수 있다는 듯이 너도나도 바벨의 탑을 경쟁하듯 쌓아 올렸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탑을 쌓으면서도 진정 하늘을 쳐다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교만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가 내려다보며 웃고 있음에도 인류는 그분과 싸우며 그 하늘을 비웃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책임진다. 이 세상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신을 부정하는 것이 집단 지성의 위대성인 줄 착각했습니다. 이론적 무신론자들은 전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은 막강했습니다. 학문이라는 미명 아래 신은 자리를 잃었습니다. 종교 안에서도 하나님은 오래전 그 권위와 명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짓밟혀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소위 실천적 무신론자들로 가득한 종교계가 된 것입니다. 지금의 신인류는 하나님의 왕권을 찬탈하여 폐위시키기 위해 부단히 역모를 꾀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들의 손안에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대 역병 코로나19는 자기만족과 자아도취에 빠져 흐느적대는 이 세상을 향한 하늘의 경종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스스로 거드름을 부리며 자족해 하는 이 교만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확성기가 아닌가요.

    오래전 연약하기 그지없던 한 신앙 공동체는 이렇게 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단호히 외쳤습니다. 허망하기 그지없는 세상 권력자들과 지도자들과 군왕들과 현자들과 스스로 똑똑하다는 지성인들을 향해 담대하게 소리쳤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구나!”(시 2:1~3)

    이들은 알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 이들은 고백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 작금 세상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들은 제3의 눈으로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시 2:4)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지금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두려움과 공포의 현실 속에서 이렇게 그분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정말 그런가요?”라고. 이 네 가지 의문사 “왜?” “언제까지?” “어디에?” “…인가요?”는 아마 이 세상에서 천성을 향한 순례자로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반복해서 외치는 외침일 것입니다.

    “왜?” “어찌하여?”(시 10:1; 22:1; 43:2; 44:23-24)
    “언제까지?”(시 6:3; 13:1-2; 35:17)
    “어디에”(42:3; 79:10; 115:2; 89:49, 참고 46절)
    “…인가?”(출 17:7)

    우리의 이해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오늘의 순례 길을 걸어가야 할지 모릅니다. 세상 어느 것으로도 위로받을 길이 없는 순례자의 비애를 품고, 천지 만물의 창조자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회의와 의심 사이를 오가며 하면서 오늘도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스스로 다짐합니다. 아니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을 경외하는 일이 눈앞에 벌어지는 대재앙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하기를 간구합니다”라고.

    이 책, 월터 브루그만의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

    신학은 과거를 되짚어보면서 현재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미래를 꿈꾸며 대안의 세계를 제시하는 학문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다루는 성서신학자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서가 단지 발굴해야 할 옛 문헌이 아니라 지금도 신앙 공동체의 삶과 신앙을 위한 경전임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옛적 말씀을 새롭게 듣는 방식을 알려 주는 사명이 성서학자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저명한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우리 시대 성서학자와 목사, 설교자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그는 옛 문헌인 구약성경을 자세히 비판적으로 새롭게 읽어 내고 거기서 얻어진 통찰력으로 현재 상황을 조명하여 진단하고 미래의 대안을 보여 주는 학문적 열정을 쏟아 왔습니다. 그는 전 세계를 두려움에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붓을 들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는 ‘신앙을 호출하는 강력한 외계의 목소리’입니다.

    우리 경험이 말해 주듯이, 심각한 위기 상황은 우리의 신앙을 불러내 대답해 보라고 강요합니다. 그때 신앙의 허실이 적나라하게 노출됩니다. 단세포적으로 반응하는 감정주의자,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단순 원리주의자, 어쩔 줄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순진무구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불행하게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기에 이르는 사람까지 다양한 유형의 신앙이 등장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코로나19에 대해 신앙인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이 감염되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재앙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신의 저주인가. 인간의 자업자득인가. 천재인가, 인재인가. 이로 인해 인류의 종말을 말할 수 있는가.

    원서의 부제가 암시하듯 우리는 지금 대재앙이 초래한 “상실과 슬픔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 공동체는 이런 인류적 위기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브루그만은 성경 텍스트가 이런 위기에 대해 이미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교회의 지도자에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성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코로나19의 한가운데서 성경적 믿음을 신실하게 실천해 보자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책에는 모두 7편의 글이 들어 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저자는 구약의 특정 본문을 정밀하게 해석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텍스트가 꿈틀거리며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을 포착해 독자가 그 역동적인 광경에 참여하게 합니다. 하여 텍스트가 강력하게 가리키는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브루그만의 통찰력 있는 본문 해석을 스케치하듯 보겠습니다. 제1장 “폭풍이 불어올 때”에서 브루그만은 레위기 출애굽기 욥기의 본문으로 코로나19와 관련해 세 가지 해석학적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언약적 제재’라는 해석입니다. 쉽게 말해 심은 대로 거두는 동등 보응의 경우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주권과 권능을 드러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자유성과 초월성을 현시하시고 하나님의 권능이 이 세상에서 무효로 만들거나 축소할 수 없는 실재임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브루그만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는 그 이상의 것과 그 밖의 것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우리 삶이 계몽주의가 추구하고 제어하고자 하는 ‘원인과 결과’의 필연 고리 안에 전적으로 갇혀 있지 않음을 깊이 자각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제2장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하나님이 선택하라고 제시한 세 가지 재앙 중 다윗이 선택한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삼하 24:1-25) 본문은 전염병이 야웨로부터 직접 오기 때문에 다윗이 선택했다고 알려 줍니다. 브루그만에 따르면 이 일화는 다윗이 야웨의 징계인 전염병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한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즉 다윗은 자기 운명을 야웨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언약에 기초한 제재를 받는 현실의 가운데서도 다윗은 자신의 생명과 지위와 권세가 야웨의 무한한 자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삼하 7:15) 따라서 우리는 다윗과 더불어 전염병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종결어라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3장에서 브루그만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종말을 경험했던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비극과 상실과 불확실성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진술합니다. 불굴의 정신으로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비와 긍휼이 인간의 모든 생각과 추측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가 마지막 단어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적 표현으로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신앙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제4장은 “바이러스 한가운데서 기도하기”(왕상 8:23-53)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하기는 순진무구한 신앙주의(fideism)와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테니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백성이 신실한 자세로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기꺼이 신뢰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관심사는 우리가 열정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 역시 거기에 맞춰 응답하신다는 언약의 집행 방식이 아니라, 우리 기도의 궁극적 지향점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는 점입니다.

    제5장은 시편 77편 해석으로 코로나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우리가 관심의 초점을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전환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시편 77편에서는 시인이 고백적 언어를 통해 자기중심적 연민의 슬픔에서 떠나 하나님께 순복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언어 순례’가 펼쳐집니다. 시인의 언어 순례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한 브루그만은 율법의 종교로부터 은혜의 종교로의 이동, 자신만의 복리를 목적으로 하는 이기적 순종의 사소한 종교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경외와 경탄과 전율을 느끼는 완전히 자유로우며 상상력이 넘치는 종교로의 이동을 간파합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코로나 위기에 이런 이동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제6장에서 브루그만은 이른바 제2이사야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이사야 43장 18~19절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강론합니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의 대담한 상상력에 동참해 보라고 권합니다. 상상력은 아직 보이지 않는 어떤 가능한 세상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대담하게 상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치 제2의 출애굽, 광야에 나는 고속도로, 사막에 피는 야생화들을 상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러한 대담한 상상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러한 미래를 열어 가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제7장의 제목이 특이합니다. “탄식의 행렬”(사 42:14~15)입니다. 브루그만은 십자가의 금요일을 통과해야만 부활의 일요일이 밝아온다는 너무도 명백한 그러나 쉽게 진부한 말로 치부되는 성경의 소중한 진리를 진술합니다. 브루그만은 이 땅에로의 추방과 십자가 사건을 “탄식의 행렬”(사 42:14~15)이라고 부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정말로 새로움을 갈망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희망한다면 실패한 피조세계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해 깊이 탄식하고 슬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슬픔 없이 위로는 오지 않습니다. 절망 없이 희망은 오지 않습니다. 고통 없이 새 생명은 출생하지 않습니다. 금요일의 십자가 없이 부활절 아침의 빈 무덤이 주는 경이와 기쁨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과 추방과 십자가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그곳에는 절망만 있을 뿐입니다. 새로움을 소망하는 이들에게만 새로움이 하늘의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이 하사하는 완전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은 깨어지고 일그러진 이 세계 안에서 애통하고 고통받고 새로움을 희망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질 것입니다.

    브루그만의 구약 신학을 대표하는 상징적 두 단어가 있습니다. “추방과 귀향”(Exile & Homecoming)입니다. 그는 구약의 신앙 역사에서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전무후무한 “상실과 슬픔과 불확실성의 경험”이 유대 신앙사의 핵심적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존재 기반과 정체성을 통째로 상실하고 깊은 슬픔과 비탄 가운데 빠집니다. 그리고 바벨론 유수란 불확실한 미래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추방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뼛속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과연 미래가 있고, 희망을 꿈꿀 수 있으며 귀향이 실현 가능한 실체인가요. 브루그만에 따르면, 이들은 귀향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공동체적으로 탄식하고 공적으로 슬퍼하며 비통하는 것을 훈련해야 했습니다. 달리 말해 부활절이 오기 전에 먼저 성금요일을 철저히 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시하고 파기한 중대한 잘못과 죄에 대해 ‘언약적 제재’의 마땅함을 깊이 인식하고 그 비참함에 대해 애통하고 슬퍼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을 향했던 삶의 방향성을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참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자비롭고(라함) 은혜로우시고(하난)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이 많으신 하나님(출 34:6)으로부터 희망의 미래가 선물로 주어질지 말입니다. 이것이 브루그만의 구약 본문에 대한 해석학적 틀입니다. 브루그만은 코로나19와 신앙에 관한 책에서 ‘추방과 귀향’이라는 신학적 은유를 사용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신앙적 대응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금 추방을 경험하는 신앙 공동체는 ‘함께’ 회개하고 탄식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대고, 우리의 상상을 넘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그분이 주실지 모르는 하늘 은혜를 희망하라고 권합니다. 그분은 어느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 주권자이고 세상 역사의 궁극적 지배자이며 자기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따라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마지막으로, 브루그만의 글에는 특유의 신학적 사고가 담긴 그만의 용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구약 신학 체계를 이해하면 다음에 열거하는 용어를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약적 제재” “추방과 귀향” “신학적 상상력” “해석학적 대안” “대안의 세계” “제사장 전승과 신명기 전승 간의 긴장” “수사와 언어” “언약 소송 양식” “예언자적 상상력” “야웨의 비교 불가성” “축소 환원적 신앙”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 “소비중심주의” “틈새의 신” “근대 합리성의 한계” “하나님의 헤세드―견고하고 끈질긴 결속, 한결같은 사랑” “부활절의 하나님과 성금요일의 하나님” “집요하고 타협 없는 희망” “탄식의 공공 훈련” “진실 말하기 공동체” “슬픔의 계절” “하나님의 자유성과 초월성” “쌍방 간 언약과 일방적 보증” “열왕기 신학과 역대기 신학” “권력과 경건 사이의 연관성” “순진한 신앙주의”(fideism) “상호 교류주의” “토라 규정들” “언어 순례”(speech pilgrimage) “나르시시즘의 문화” “안전한 종교” “소비자 나르시시즘” “낙천적 종교의 긍정적 사고” “사소한 도덕주의적 순종의 종교” “헤세드, 하난, 라함의 자유로우신 하나님” “착취를 일삼는 세상” “상상력의 대담한 행위” “예언자 전승” “예언자와 새로움(newness)” “(심리)치료 문화” “오락성 종교” “미래 없는 탄식” “탄식 없는 미래” “추방과 십자가” “새로움과 희망의 신학” “세계화와 진화론적 세력” “승리에 도취한 크리스텐덤” “비평적 실증주의” “구약의 사회학적 요소” “정의와 질서와 이데올로기” 등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적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경제 교육 문화 정치 가정 자연 등에 대해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인도 예배 기도 교제 설교 헌금 성례 심방 등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적 신앙”에 대해 근본적 성찰을 요청받게 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코로나19 사태는 매우 긍정적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브루그만이 잘 지적하듯이, 코로나19 팬데믹이 초래한 혼란이 신앙을 호출하고 있습니다. 호출된 신앙은 진실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브루그만의 책은 신앙의 위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고, 그 진실을 담대하게 말하도록 가르쳐 주는 소중한 안내서입니다. 책 안에는 브루그만스러운 함축적이며 색다른 표현들이 많기에 독자들은 그 표현 속에 담긴 신학적 육즙을 음미해야 합니다. 본문을 천천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시대를 함께 거쳐 가는 동료 목회자와 설교자, 신학생에게 영적 유익과 신앙적 확신을 공급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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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호준 목사(전 백석대 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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