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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선교의 아버지’ C. 르네 파딜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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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1-04-29 | 조회조회수 : 1,4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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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자들에게 '회적 행동과 전도' 강조했던 신학자이자 출판인

 

 

복음주의 학생들의 국제 펠로우십을 가진 신학자이자 목사, 출판인으로 ‘통합선교의 아버지’로 불린 C. 르네 파딜라(René Padilla)가 미국시간으로 4월 27일 88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겼다고 미국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에서 발행하는 크리스채너티투데이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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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르네 파딜라(René Padilla)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통합 선교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는 파딜라는 500개 이상의 기독교 선교 및 구호 단체가 채택한 신학적 틀을 제시했던 인물이다. 특히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은 사회 행동과 전도가 필수적이고 분열할 수 없는 요소로 비행기의 두 날개와 같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사명을 넓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딜라는 1974년 7월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BGEA)가 후원한 스위스 로잔대회에서 150여 개국에서 온 약 2,500명의 개신교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135명의 교단 대표들이 참석한 모임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강연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왔다.”며 미국 복음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생활 방식"을 전 세계 선교 영역에서 적용한하는 것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또한 ‘사회적 책임’과 ‘가난한 자에 대한 보살핌’을 강조했었다.


특히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로잔대회의 강연자로 초대를 받았으며, 로잔언약 초안자인 존 스토트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는 로잔 언약에 사회적 요소를 나중에 포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딜라는 로잔대회 연설을 통해 교회의 사명을 복음 메시지 자체의 내용, 즉 사회적 현실이 담긴 내용과 연결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파딜라는 로잔 운동의 궤적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편 C. 르네 파딜라는 카를로스 르네 파딜라는 1932년 10월 12일 에콰도르 키토에서 태어났다. 파딜라의 삼촌인 에디 부에르토의 영향으로 그의 부모는 모두 태어나기 전에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고, 에콰도르 최초의 복음주의 목사 중 한 명이 되었다.


파딜라는 십대 시절 이 지역의 미국 선교사 공동체와 함께 전도 프로젝트를 개척하고 HCJB 라디오 사역을 위한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을 번역했다.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956년 미국 선교사 짐 엘리엇, 네이트 세인트, 피트 플레밍과 함께 사역을 하기도 했다.


또한 196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빌리그레이엄 전도운동에 동참했으며, 1970년대에는 로잔언약을 기초한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특히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젊은 복음주의자들과 미국과 영국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점점 신학적 격차가 커지는 것을 파헤쳤다.


그는 국제적인 복음주의 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인터바시티 기독교 펠로우십(IVCF)과 같은 신학저널과 학생 출판물을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파딜라는 미국에서 종종 직책을 맡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목회하면서 카이로스통합 선교센터를 이끌고, 에이치아톤 카이로스출판사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책을 수백 권출판하기로 결정했다.


파딜라는 또한 라틴 아메리카 신학펠로우십(FTL)과 복음주의 선교부 신학자들의 국제 펠로우십을 공동 창립했으며, 영국 티어펀드 영국과 아일랜드, 미카 네트워크의 회장을 역임했다.


라틴 아메리카 신학동호회는 수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 발전으로 판명 될 수 있다.


파딜라는 경제 이민자이자 종교 소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폭력, 억압, 배제의 맥락에 의해 형성되었다. 고통과 신학의 관계는 파딜라에게 유기적인 관계였다. 젊은 시절, 그는 "억압, 착취, 권력 남용으로 깊게 표시된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고 회상했다.


십 대 시절, 파딜라는 에콰도르 안데스 호에서 미국 선교사 조종사 네이트 세인트의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성도는 짐 엘리엇과 피트 플레밍과 함께 최근 키토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복음주의 어린이 성경 캠프를 조직했다.


1956년 전도 시도실패로 워라니 원주민에 의해 세 명의 선교사가 살해되었을 때, 파딜라는 엘리엇의 모교인 휘튼 칼리지의 학생이었다. 그들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953년 가을 캠퍼스에 도착한 파딜라는 키토에서 선교사로 봉사했던 빅터 레이먼드 에드먼(Victor Raymond Edman)의 도움을 구하고 그의 부모와 함께 기독교 및 선교사 동맹과 함께 일했다.


에드먼은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하고 비행기 요금으로 빚을 지고 있는 새 학생을 지원하여 일자리를 찾고 캠퍼스 자원과 연결하도록 도왔다. 1959년까지 파딜라는 철학 학사 학위와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딜라는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전후 시대의 가장 저명한 보수적 복음주의 성경학자"로 불리는 F. F. 브루스, 라일랜드 성경비평 교수에게서 성경 주해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브루스와 함께 공부하면서 파딜라는 더 넓은 복음주의 세계에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파딜라의 첫 번째 아내인 캐서린 페서 파딜라는 지난 2009년에 의해 사망했다. 그의 두 번째 아내 베아트리즈 바스케스와 카타린, 다니엘, 마가리타, 엘리사, 사라, 룻과 함께 다섯 자녀와많은 손자 손녀들을 두었다.


김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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