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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목(裸木)과 질풍가도(疾風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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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작성일2023-12-06 | 조회조회수 : 2,2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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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주위의 공원 안에 작지 않은 숲이 있다. 가끔 걷는 숲길인데 지난 며칠 새 나뭇잎이 다 떨어져 벌써 벌거숭이가 되었다. 다른 동네 나무들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너무 이르게 옷을 벗은 것 같아 안쓰러웠다. 봄부터 뽐내온 자태가 여름의 우거짐과 가을의 단풍으로 한껏 멋을 내더니 이제는 추운 밤에 덮고 잘 것조차 하나도 없었다. 겨울 눈이 소복이 와서 그들을 감싸기까지는 당분간 그렇게 지내야 하리라. 


    저 벌거숭이 나무들은 자기 자리에 서서 무엇을 생각할까. 옆의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보이지 않는 자기 뿌리와의 관계는 어떨까. 불현듯 궁금해졌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내 모습이 어때? 초라해 보이니? 너도 머잖아 이런 날이 온단다. 그래도 나는 희망이 있단다. 이 겨울에 그냥 웅크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야. 찬란한 봄을 준비하는 중이지. 잘 들어봐, 내 희망의 노래를...” 나무는 바람을 선율로 삼고 멋지게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뒤로하고 남은 숲길을 걷는 나의 귓전에 나무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너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벌거숭이가 될 겨울에도 나처럼 희망의 노래를 멋지게 부를 수 있겠니?”


    최근에 “질풍가도”라는 노래를 들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에니메이션의 OST 곡이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너에게/ 그래 이런 내 모습 게을러 보이고 우습게도 보일 거야/ 하지만 내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에/ 나는 다시 태어나 싸울 거야/ 한 번 더 나에게 질풍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너에게” 응원가로도 많이 부른다는 “질풍가도”는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다시 일어나 드넓은 대지로 달려가는 희망의 노래다. 모두에게 우습게 보였던 만화의 주인공도 좌절과 포기 대신 희망을 찬란히 노래하며 질풍같이 달려간다. 


    며칠 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목회지를 떠나시는 어느 목사님과 통화하였다. 그 목사님에겐 어느 것도 남지 않았다. 목사님을 떠나지 않은 것은 사모님뿐이었다. 아니다. 하나님도 계셨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탄식하는 대신, 원망하는 대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그 목사님과 사모님을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두 분 다 아주 밝은 모습이셨다. 통화하면서 들어보니 앞서 밝게 뵈었을 당시에도 이미 하나둘 떠나보내고 계신 시간이었다. 익숙했던 모든 것이 다 떠나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목사님과 사모님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는 결코 애잔한 곡조가 아니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나목(裸木)은 곧 다가올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둘 다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나는 추운 겨울날에 홀로 벌거숭이가 된다. 그 매서운 겨울을 나는 어떻게 맞이하고 견딜 수 있을까. 소심한 나는 그런 날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날은 피할 수 없는 날이다. 어떻게 겨울을 넘어 새로운 봄을 준비할 수 있을까. 겨울의 어떤 혹독한 날에도 나는 희망의 노래를 과연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12월, 겨울에 오신 예수님은 내게 그런 희망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수 있으시다. 나목(裸木)의 노래보다 더 멋지게. 질풍가도(疾風街道)보다 더 찬란하게.  


    김성국 목사(미주크리스천신문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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