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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인가? 머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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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작성일2020-08-17 | 조회조회수 : 1,975회

    본문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사람 만들기'.

     

    훌륭한 인격을 가진 건전한 성인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필요에 따라 기술 등의 훈련을 하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고 부차적인 것이다.

     

     

     

    옛날 특히 조선시대의 예를 보면, 소위 백정이라는 도축업자는 천민이었다.

     

    그들은 훌륭한 인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기술 습득이 최우선이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도축을 보고 배운다.

     

    그래야 가업을 이어받을 수 있으니까.

     

    가죽 공예를 하는 가파치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가죽 다루는 법을 배운다.

     

    머슴들도 마찬가지다.

     

    마당 잘 쓸고, 가마니 잘 짜고, 물 잘 길어오고, 나무 잘 해오면 된다.

     

    그러한 것들은 교육의 본질적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대학교에서

     

    학문의 이치를 연구하는 '문리대'가 가장 인정받고 각광받았다.

     

    단편적 지식 습득이 아니라 학문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대학 교육의 목표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문리대가 사라지고 인문학과 기초과학은 천대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의대, 법대, 상경대 등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존 듀이의 실용주의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1920년대 미국과 일부 서구 사회를 휩쓸었던

     

    존 듀이의 실용주의는 결과만을 중시한다.

     

    결과가 없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미국 쪽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교육계에 포진하면서 존 듀이의 사상을 도입했다.

     

    그리고 그 사상은 사회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꿩 잡는 것이 매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의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존 듀이의 사상은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결과만 가지고 말하기 시작했다.

     

    체육시간은 유명무실해졌다.

     

    대학입시와 관계 없는 윤리, 음악 등은 설 자리를 잃었다.

     

    교육의 목표와 대상은 지덕체를 겸비한 전인이다.

     

    다시 말하지만 특정한 기능이 아니다.

     

    특정 기능 습득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도축업자나 가파치에게 해당되는 훈련이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와 학생, 학부모의 모든 목적은 대학입시에 있다.

     

    그것도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고민하는 인문학이나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초과학이 아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보라. 지금의 아이들이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가?

     

    단짝이 아파서 결석을 해도 노트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사람이 아니고 기계 심지어는 정글의 법칙만을 익힌 짐승이다.

     

     

     

    다니엘서 2장의 우상은 역사의 흐름을 나타낸다.

     

    인간의 역사는 금으로 시작해서 진흙으로 끝난다.

     

    지금은 진흙의 시대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인류의 삶 전체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섹시하다'는 말은 윤락가

     

    여성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또는 소위 노는 아이들이 여자에게 수작을 걸 때 쓰는 말이었다.

     

    여염집 아가씨에게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섹시하다는 말이 가장 큰 칭찬으로 여겨진다.

     

     

     

    옛날 노예 시장에서는 팔 물건(?)인 노예가 등장한다.

     

    노예를 살 사람들은 노예의 입을 벌려 치아의 건강상태를 살피고

     

    근육을 만져보는 등등의 선별 과정을 통해서 입찰을 한다.

     

    입찰에서 제시하는 가격은 노예의 노동력과 능력을 돈으로 환산한 액수다.

     

     

     

    그 당시 올림픽 선수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아마추어였다.

     

    돈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면류관으로 상징되는 명예가 최고의 것이었다.

     

    돈을 주고 받는 것은 노예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프로 스포츠 시장을 보면서 로마시대 노예 시장을

     

    떠올리는 것은 나 뿐인가?

     

    프로 스포츠 선수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만 계산하고 돈이 모든 가치가 되어 버린

     

    끔찍한 자본주의 정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타락한 자본주의는 '진흙' 시대의 최고 정점이다.

     

    칼 막스가 이런 모습을 내다보고 '자본론'을 썼다.

     

     

     

    그렇다고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오해하지 말라.

     

    나는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민주주의던 왕정이던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이다.

     

    이것은 그저 인간이 만든 시스템 중의 하나들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성경의 가치를 완전히 이루지 못한다.

     

    '부평초'라는 칼럼에서 나는 인간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연못에 떠 있는 부평초라고 표현했다.

     

    누구는 민주주의의 부평초에 올라 있다.

     

    누구는 왕정의 부평초에 올라 있다.

     

    그런데 그 연못을 지배하며 물결을 일으키는 자가 바로 사탄이다.

     

     

     

    어차피 이 세상은 주님 오시기 전까지 사탄에게 위임된 것이다.

     

    사탄은 어떻게든지 주님의 가치를 훼손시킨다.

     

    이 칼럼에서 내가 쓴 '민주주의'에 관한 글을 찾아보라.

     

    나는 그 글에서 민주주의의 마지막이 잘 해야 바벨탑이요

     

    궁극적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썼다.

     

     

     

    지금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라.

     

    한국만 해도 소위 '차별 금지법'에 대한 갈등으로 분열되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서도 한 목소리를 못 내고 있다.

     

    한국의 87개 기독교 단체가 '차별 금지법'에 찬성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정치는 좋은 것이고 왕정은 나쁜 것인가?

     

    우리나라에도 세종대왕의 치세가 있었지만

     

    저 멀리 로마에는 5현제 시대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부평초 위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세상이라는 연못에서 나와서

     

    성경적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목사는 더욱 그래야 한다.

     

    그런 시각이 없는 자들은 목사를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사탄의 종들이 목사의 탈을 쓰고

     

    부평초 하나 하나에 모든 가치를 두게 만든다.

     

    지금 코로나 시국에 정권 퇴진 운동을 위해 모인다고 한다.

     

    사탄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크리스천이라는 자들이, 그것도 목사의 탈을 쓴 자들이

     

    하늘의 가치를 짓밟아 버리고 세상 가치에 매몰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오직 세상에만

     

    묶어 두는 모습은, 오늘날로 말하면 모든 예능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내 귀에는 사탄이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린다.

     

    끔찍한 예레미야의 시대여.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5: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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