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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조상 필그림 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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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미국이 있기까지 미 대륙에 발을 디뎠던 사람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물론이고, 스페인, 프랑스 등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미 이 대륙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륙에서 살기 위하여 이민을 왔고, 죽음을 무릅쓰고 그곳에 정착하였던 최초의 영국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s) 혹은 ‘필그림 파더’(Pilgrim Fathers)로 불리어지는 영국의 청교도들입니다.

       영국의 왕 헨리 8세가 1534년 로마 카톨릭 신앙을 거부한 이후로, 왕은 영국 국가와 교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이 수장령으로 모든 성공회 사람들은 동일한 전통과 예전과 의상으로 예배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스코틀랜드는 물론이고, 잉글랜드까지 거세게 밀려 들어왔습니다. 다양한 경향을 가진 캘빈주의적 전통에 선 사람들이 영국의 청교도들입니다. 이들은 온건파도 있어서 성공회 내부에서 살았지만, 독립파 분리파도 있어서 독자적인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필그림은 청교도 중에서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와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분리주의자들입니다. 캘빈주의 신앙을 가졌던 그들은 기존의 성공회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로운 예배를 위하여 당시 개신교 신앙에 대하여 관용하고 핍박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네델란드로 가서 살려고 하였습니다. 1607-1608년 사이에 그들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레이덴시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레이덴은 30,000명 정도가 살고 있고 레이덴 대학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였습니다. 안정된 도시 속에서 그들은 열심히 적응을 하였습니다. 대학에서, 인쇄소에서, 공장과 양조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였으나, 영국의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던 사람들은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란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고, 점차 자녀들은 그곳의 방탕한 도시문화에 동화되어 전통을 상실하는 것 같았습니다. 적응이 어려운 몇몇 사람들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결국 네덜란드에서 흡수되어 신앙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위기의식에 빠졌습니다. 10년의 네덜란드 생활을 통하여 이민을 경험한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미국의 정착이 생명을 담보로 한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메이플라워호의 항해일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신대륙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은 영국에서 탄 다른 28명의 신앙인들과 함께 1620년 9월 6일 성공적으로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66일의 힘든 항해 중에 선원 1명과 승객 1명이 죽고 한 아이가 출생하였습니다. 1620년 11월 9일에 그들은 육지를 보았고, 11월 21일에 신대륙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배 안에서 41명의 성인들이 서명하여 “메이플라워 서약”을 세웠고, 이를 통하여 선거와 투표, 다수결의 원칙을 결정하여 민주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한 해가 지나면서 그들의 절반은 운명을 달리하였지만, 생명을 바쳐 신천지를 개척한 그들의 신앙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적 근원이 되어 새로운 활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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