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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의 영혼의 밤] 제2장 영혼의 밤의 실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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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과정을 거쳐 영혼의 밤을 지났다고 해서 무조건 신위적인 믿음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밤은 어떤 이에게는 자신과 주위를 살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한편, 어떤 이에게는 자신과 후손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남기게 되기도 한다. 전대미문의 위기를 맛본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이 신위적 믿음 세계로 돌입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마지막 지푸라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파산이 없으면 신위적인 믿음도 없다. 그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이 세상에 와서 이룬 것 모두를 잃는다는 것은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 또한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나를 움직이는 육신의 존재가 명확해진다. 이 세상의 것 중에 혹 내가 의지하는 것이 있으면 가감없이 부서져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배우자든 자식이든 자신이 이룬 업적이든 대의명분이든, 자신과 연관된 모든 것 심지어 삶의 목적조차도 파산을 맞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면”(요 15:19) 그 길밖에 없다.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배설물”(빌 3:8)로 여긴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철저한 파산이다. 인위적인 믿음에 금이 가야 인생은 신위적인 믿음의 세계를 원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감정 처리다.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통증 때문에 우리의 내면을 대면하기가 괴롭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 육신은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보호하려고 마지막 시도를 한다. 위기란 평소의 자신이 밖으로 드러나는 시간이다. 위기를 만나면 우리의 방어 기재인 육신(肉身)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믿음을 가진 이의 지나친 금욕적 삶이나 또 치우친 감정은 ‘디퍼 워크’(Deeper Work,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하는 데 거침돌이 된다. 감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육신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원치 않는 사건이 일어나면 사건만 본다. 즉 하나님을 주목하는 훈련이 부족해서 어떻게든 이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고 통증을 최소화하고 다시는 이러한 통증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정력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그러하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도 이용한다. 전형적인 인위적 믿음의 단계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치 않는 사건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사건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신앙생활 중에 가장 힘든 때가 바로 환경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환경이 변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크고 비밀스러운 일들을 경험했다는 그리스도인을 종종 만난다. 오늘도 어떤 믿는 이들에게는 기도한 대로 계약이 이루어지고, 자녀들은 좋은 직장과 학교에 가고, 병이 들었다가 치유되고, 사업이 원하는 대로 굴러 가고, 기도와 소망대로 일이 풀려 나가고 있다. 또 반대로 동시다발적인 영혼의 밤으로 씨름하는 이도 있다. 이들에게 믿음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일 우리의 믿음이 이 세상에서 반전을 맞아 해피엔딩을 이루기 위한 디퍼 워크라면 이러한 논리는 기복신앙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상담을 하다 보면 복음서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와 동일한 결말이 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열 명의 병자 중 오직 한 사람만 돌아와서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했다. 병의 나음은 정상적인 삶의 시작에 불과하고 인위적인 믿음의 출발에 불과하다. 이어서 신위적인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면 항상 하나님을 나의 필요 이상의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된다.


    예수께서 생애 처음 하신 대중 설교의 첫 마디가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을 보면 가진 것도 없고 실패하고 기도 응답도 시원찮게 받아 믿음에도 실패한 것같이 삼각파도를 만난 이들에게 삶의 핵심을 말하는 것이 복음의 관건일 것이다. 광야는 변변한 것이 없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는 곳이다. 인생은 광야에서 무엇을 이룩해 보려고 한다. 그런데 광야는 있는 곳이 아니라 없는 곳이고,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싶은 것을 빼앗기는 곳이고, 훈련을 받는 곳이 아니라 나의 육신을 보는 곳이고, 그 육신이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는 곳이다.


    이사야 50장 11절처럼 영혼의 밤을 온전히 소화하면 신위적인 믿음의 세계로 인도되지만, 반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면 더 큰 고통 속에 눕는다. 영혼의 밤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만 또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은 같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는 이에게는 영혼의 밤이 되고 그렇지 않는 이에게는 단순히 고통의 시간이거나 혹은 역경을 통해서 더욱 강인한 자아를 만들어 내는 시간이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접어든 구미 문화를 급속히 따라잡고 있다. 유럽 개신교회가 지난 300년에 걸쳐서 경험한 융성과 쇠락을 한국 개신교가 지난 30년 동안 빠르게 답습하였으며 질적인 퇴보도 그러하다. 믿음으로 매 순간 사는 신위적인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인위적 믿음에 머무르게 되면 신앙생활은 본격적인 죽음길에 접어든다.


    에스겔은 영혼의 밤과 죄와 회개의 관계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겔 35:5) 영혼의 밤은 환난으로 마칠 것이 아니라 죄를 끝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밤이 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혼돈 가운데 있겠지만, 이제 밤이 왔으니 과감한 선택으로 영혼의 밤을 극복하면 영적 반전을 맞을 수 있다. < 계속>


    성경적 상담 세미나 문의: isaya5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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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호진 교수 


    약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이민 

    1981년 오하이오주립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2011년 정년 후 해외 직장생활을 접고 36년 만에 한국으로 귀국.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으며,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학협력교수,

    현재는 한동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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