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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 로마서(2판) 강의 제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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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Kerygma Theology Academy| 작성일2022-10-19 | 조회조회수 : 9,83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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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 로마서(2판) 강의

    5강 롬 2:1-29 김민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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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호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롬 2:1-13 재판관

    롬 2:14-29 심판


    2:1-3, 20에서 등장하는 것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복음 속에서 선포된 인간의 유죄판결은 진정으로 모든 인간들에게로 확대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속에서 타올랐던 그의 진노를 자신과 연결시켜야 한다.
     
    우리는 3:1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과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에서 어떻게 바울의 사고의 결론이 요약되고 있는가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2:1에서 스스로를 예외로 만들기 원하는 한 인간 (인간 전체 무리의 대표자)에 대해서 듣는다. 그리고 이어질 모든 논쟁들은 그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17절에서야 비로소 그가 유대인으로 불리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마치 바울이 갑자기 일어서서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예수의 공동체 건너편 언제나 회당이 놓여있는 막다른 골목길을 향해 외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분명히 유대인을 겨냥하고 있었다: 할례받은 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맺으신 계약의 책의 소유자이자 독자, 마지막 글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율법의 완성 속에서 자신의 삶의 내용을 구하고 발견했던 사람. 이 사람은 1:19f.에 등장하는 고발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으며, 거기에 쓰여진 하나님의 진노에 스스로 해당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천지의 창조주인 참신 외에는 그 어떤 신들이나 우상들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1:24f.에 등장하는 죄들도 그에게서 쉽게 입증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이 그를 마음의 욕정이나 "부끄러운 욕심"(1:26)에 넘겨주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는 이방 대도시와 이방세계 전체에 욕망에 참여하지 않은 비판적 구경꾼으로서 낯설고 우월한 자이다.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려진 자신을 향한 사형선고를 알지 못하는 자이며, 반대로 그는 자신의 가장 높은 종교적 권위와 예루살렘 민족의 음성을 통해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를 통해 새로이 "자신이 신성모독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러한 자는 자신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광야로 - 그에게 맞게 그 곳에서 죽게 하기 위해서 - 추방되었고, 추방되어야 함"을 입증하고 천명했다. 바로 이 유대인을 향해서 바울은 지금 "그가 잘못했으며, 바로 그가 변명할 수 없음"을 말한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시는 문제는 비로소 이제, 바로이 유대인에게 와서 전적으로 진지해진다. 이 인간의 불신앙과 불의와 비교했을 때 1:19f. 이하에 등장하는 불신앙과 불의의 이방인들은 무엇인가? 이 경건한 유대인, 순수한, 즉 자의적이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향하는 경건과 삶의 모습을 가진 인간과 비교했을 때, 앞에서 특별히 서막처럼 먼저 등장한 경건한 이방인은 무엇인가? 

    "그로부터" 이제 바울은 이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1:19f.에서 이방인에게 말하여진 것이- 이제는 너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바로 너에게서, 너의 한 복판에서, 너의 존재와 행위 속에서 인간의 모든 불신앙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바로 "율법을 통해서", 즉 "너를 이방인들의 악한 세계로부터 실제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구별하고 너를 우월하게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죄에 대한 인식, 객관적 서술과 확인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이 단락의 마지막 진술이(3:20) 증언한다. 

    네가 단지 모르고 있는 것은, 네가 다른 이들에게 행하며, 네가 이방 세계 전체를 관찰하고 정죄하는 그 비판이- 그것은 옳으며, 너는 그것을 율법으로부터 얻었는데- 다른 모든 이들보다 먼저, 이방 모든 세계보다 먼저 네게 해당된다는 사실이며, 이는 (네 비판의 대상으로서) 거기에서 행해진 일들을 단지 너도 또한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먼저 행하기 때문이다(:1).

    이방인들이 1:19f. 이하에서 서술된 존재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네가 또한 그것을 보고 말하는 것은 옳다 (2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지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그러나 네게 더 급한 문제를 지적하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5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대해서 말하며, 16절에서는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난다고 적고 있다. 그는 진리이며, 하나님의 의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11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외모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ohne Ansehen der Person)", 그렇기에 하나님은 모든 가면들을 뚫고 인간들의 진정한 얼굴을 보시며, 그렇기에 비판하는 유대인과 비판받는 이방인 사이에는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비판하는 유대인이 먼저 그리고 원래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는 자로 서게 되며, 그렇기에 유대인들의 죄, 악한 세상의 죄들은 원래 유대인의 죄에 대한 후차적인 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이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 실제로 그의 손에 놓여 있을수록, 그를 향한 약속들과 위협들은 - 9절과 10절에서 두번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 먼저 그, 유대인에게, 그리고 난 후에 비로소 간접적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자가 되면서, 모든 인간들이, 즉 우선 - 예수가 그들 가운데 서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율법을 향한 자신들의 관계에 따라서, - 그러나 그가 율법을 따라 심판하며, 율법의 실행자가 바로 그이기 때문에 -예수를 향한 그들의 관계를 따라서 심판받게 된다.

    그리고 1:19f.에서 서술된 이방인의 존재와 행위에 대해 그에 -합당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유대인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인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저들이 행하는 것을 먼저 그리고 원래적으로 행하는 그는 (:3). 왜냐하면- 이것을 그가 간과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는데-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진리와 의의 심판 속에서 실행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을 향한 그 어떤 정죄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그의 구원을 선포하고 보장하는 소식을 통한 정죄이며, 이 소식이란 "불신앙과 불의의 옛사람으로서의 그가 죽어도 되며,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골고다로 향하는 그의 죽음 속에서 이미 죽었으며, 이는 이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신 분 안에서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이 정죄는 회개와 그의 사고와 존재의 회심으로 이끈다. 그렇기에 이 정죄는 그에게, 유대인에게 먼저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를 먼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세운다.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이 놀라운 구원의 날에 (an diesem, nicht auf diesen!) 그러나 유대인은- 그는 이 날,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갖는 은혜로운 의미를 알지못하며 무시한다- 언제나 "이방인들이 행하는 것들이 얼마나 악하며, 그 자신은 그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진노를 쌓기"만 (문자적으로는: 진노를 보물처럼 모으는 것) 할 뿐 이다(:5).

    "그러나 다시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함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에게 해당되지 않는 한, 쌓이기 위한 것도 아니요, 독자적인 관찰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진노를 타인을 위해 쌓아가는 이는 결국 그를 통해 자신을 위해 쌓아가는 것이다. 타인들을 보며 사형선고에 머물러 있는 이는 그를 통해 자신의 사형선고를 굳건히 하는것이다. 하나님의 정죄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메시지처럼 모든 인간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와 용납하심과 오래 참음에 대한 판결로서 끝까지 (zu Ende)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유대인은 타인들과 관련해서 끝까지 듣고자 하지 않으며, 그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강팍해져 있으며, 회개하지 못하는가를 드러내고, 결국 스스로 사형선고 아래 서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이다(:6). 예수의 판결 앞에서 우리는 각기 스스로의 존재와 행위에 있어서 그의 판결을 끝까지 듣기 원하는 이들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또한 그에 근거해서 저 판결의 처음, 즉 "죄인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선 채 죽어야 한다"는 저 처음을 철저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저 복된 끝을 향해 진지하게 회개를 하는가 - 에 따라서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결단을 하게 될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 타인들과 우리 자신들을 위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가 되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설 수도 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이방인들을 향한 자신의 비판을 통해서 그것이 은혜가 되지 못하게 하며, 그를 통해서 결국 그 자신이 먼저 패망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이자, 그의 불순종이며, 경건하거나 경건치 않은 이방인들의 모든 우상숭배와 불의는 그에 대한 약한 모상일 뿐이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그 행한 바들을 따라 보응하실 때, 어떻게 될른지"는 11절의 빛 속에서 7-10절에서 전개된다 : 하나님의 이러한 기준 앞에서는 그 어떤 가면도 -유대인들의 모든 헛된 특별한 위치는 가면이다-소용이 없으며, 하나님은 인간 (:16) 행위에 대한 판결에 있어서 그들의 마음을 보신다.

    7-10절은 하나의 사고를 변형시키고 있다: 유대인이 먼저, 그 후에는 헬라인 또한- 뉘우칠 줄 모르는 악행을 행하며, 회개의 선행을 선택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한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판단 (1:32 "인간은 죽음에 속해 있노라")아래 서 있다.

    왜냐하면 전체 맥락과 단어를 보면 다음의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불의 대신 진리에 순종해야 하며(:8), 그렇기에 심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그러기에 또한 그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회개해야 한다.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길로서의 이 선한 행위 속에서 견인 Beharrlichkeit이 중요하다 (:7).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속에서 그의 자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신앙의 신실함이 중요하다. 이를 행하는 자는 영광, 존귀, 평화를 실제로 얻게 될 것이다(:10).

    그러나 이를 행하고자 하지 않는 자,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의 자세가 보여주는 저 투쟁욕 (아마도: 공로에 대한 사고 Lohnarbeitergesinnung)을 드러내면서 그 속에서 그 어떤 은혜도 원치 않으며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 재판관으로부터 진노와 분노, 환란과 곤고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8-:9) 그는 저 재판석 앞에 세워진 채 그 모든 것을 이미 선택했고, 스스로를 심판했다.

    오직 자신만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고 알며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왜 유대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가? 12-16절에 의하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한 판결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기 Herzen erforschen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가지고 있지않은 이들 모두가 동일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는가, 행하지 않는가? 그들이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율법 없이 망하는 것처럼, 율법을 가지고 망하게 될뿐이다(:12). 예수의 심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을 듣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시각에서는 전적으로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14-15). 즉, 렘 31:33의 약속의 놀라운 성취 속에서 율법이 그들 속에 놓인 채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 즉 겔 11:19 & 36:26 말씀의 성취 속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마음을 주셔서, 그들이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고, 율법을 가지지 않고도 그들의 인간적 본성 속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는 자들, 그래서 그들의 양심 속에서 고발과 변명을 가진 율법의 금지와 계명이 생각의 형태 속에서 마주 서는 장소가 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존재한다. 

    바울은 26절 이하에서 다시금 이 놀라운,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을 듣지 않았던 율법의 행위자들, 할례 없이 할례 받은 자들을 논한다. 이미 이 본문의 관점에서, 그리고 여기에 분명히 관련되어 있는 저 예언서 말씀의 관점에서 보아도, 바울이 14-15절에서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도덕적 자연법을 근거로 율법을 실제로 실현한 그 어떤 이방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은- 1:19-:21 을 이방인에게 고유한 자연적 신인식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 1:19-32에서 이방인의 존재와 행위에 대해 말한 것, 그리고 3:9, :19에 맞지 않는다. 바울이 14-15절에서 유대인에 대립적으로 제시한 이방인들은 이방 기독교인들로서 (바울은 이들을 가령 11:13, 15:9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간략한 방식으로 말한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통해서 저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되었던 것들이 주어졌으며,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이 주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제 또한 행하고 실행해도 되며, 그렇기에 그들은 이제- 이것은 놀라운 역전인데- "이스라엘이 동일한 길로 인도되지 않고, 여전히 저 반역의 회당으로 모이는 한에서 다음의 사실을 고발하면서 이스라엘에 마주서게 된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읽혀지지만, 행하여지지 않으며, 이는 거기에서는 회개의 선한 일이 행해지지 않고, 은혜가 은혜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24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유대인이 쓰인 하나님의 율법과 십계명을 확고히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또 그가 (17-20절에서 자세히 서술하는 것처럼) "윤리 도덕적인 입장 을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확고히 붙잡고, 그 자체로 분명히 드러내는 것도 그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 본문들 속에서 드러나는 역설적 상황이며 Ironie이며, 뿐 아니라, 이방의 수도와 이방 세계 속 유대인들에게 실제로 주어진 위치이자 선교적 과제 Mission이다. 이스라엘은 구약성서의 많은 말씀들을 따라 여기에 적혀있는 정체성을 갖기 때문이다: 즉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율법 속에서 "인식과 진리의 화신(형태)" 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는 것은 그 형태일 뿐이며, 그리고 이 형태 속에서 살고자 하는 열심에도 불구하고 인식과 진리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식과 진리, 율법의 총체와 정수는 (Vgl. 10:4)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향한 관계 속에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향하는 자들이 아닐 뿐 아니라 (:12-14), 그 범법자들로서(:23) 십계명 모두를 범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세상 속 이스라엘의 저훌륭한 역할을 완수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오히려 그에게 - 이것은 그들에 대한 겔 36:20의 예언인데 - 이방인들 속에서 치욕을 마련 하고 있다. 21-22절을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가령 바울이 동시대 유대교를 비판하던 특별한 행악이나 악한 관습들의 묘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도둑, 간음한 자, 성전 모독자로 부르는 것은, 그들이 골고다의 날 예수에게 행한 것들과 그리고 그의 부활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드러난 은혜의 기쁜 소식을 - 이를 찬양하는 공동체를 박해하면서 - 거부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예수에게 행하고 있는 것들로 인함이다. 자신의 메시아,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의 하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준 이가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이를 다시금 반복하는가? 이를 유대인이 범했고, 여전히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서 -여기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처럼 우선 그에게서- 하나님 앞에서의 영광을 가질 수 있는, 즉 모든 이들에게 관련된 고발에 대해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제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의 할례도, 그리고 그와 함께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이방민족들로부터의 그의 구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못한다. 왜냐하면 할례는 율법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할례는 율법의 준수를 위한 구별을 나타낸다. 율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미 드러난 것처럼, 율법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실제로 지켜지기 보다는 범하여졌는데 - 저 구별은 실제로 무의미해지면, 그들은 - 먼저 그들은 - 이방인들이 있는
    곳에 서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불의한 자들로서 그리고 거기에서 할례의 표식은 아무 것도 바꿀수가 없다(:25).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다시금 무할례자들의 존재로 인해 수치를 당하게 되는데, 이들은 회개하고 믿으면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고 완수하며, 그를 통해 자신들의 무할례를 할례로 인정받게 되는 자들로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시선 속에 들어오고, 이스라엘의 현실과 그 모든 약속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이다(:26).

    그리고 이처럼 본래 무할례자들의 존재는 - 여기에서 바울은 다시금 이방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말한다 - 이제 단지 외적이기만 한, 조문에 따라(:27) 할례자인 유대인들을 다시 정죄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래 - 하나님 앞에서, 그렇기에 진실로 - 누가 유대인이며 아브라함의 자녀이며, 모세 민족의 일원이며, 다윗을 향한 약속의 상속자인가? 이는 인종과 혈육, 그리고 자신의 몸에 행해진 할례에 따라서 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간
    단히 말하자면, 이는 인간의 시선과 생각 속에 놓인 "표면적인 offenkundig" 유대인이 아니라 (:28), - 하나님이 보시며 그를 따라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순수한 자들과 불순한 자들을, 자신에게 속한 자들과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자들을 구별하시는 - 마음의 은밀함 속에 있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이란 저 은밀함 속에서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속에 있는 칭찬 만을 원하는 이로서(:29) 칭찬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 이방인 출신이건 유대인 출신이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그렇기에 그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하는 기독교인,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을 죽음으로 판결내리는 분의 자비를 찬양하는 기독교인 그러나 자신을 예외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유대인은 이를 행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그는 저 칭찬을 받을수 없고, 바로 그렇기에 그는 전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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