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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생명의 말씀, 창조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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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에큐메니안| 작성일2020-10-02 | 조회조회수 : 4,2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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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55:1-5; 요일 1:1-7; 눅 10:38-11:4) 창조절 다섯째주일(10월4일)

    세계성만찬주일/군선교주일


    1. 세계성만찬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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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성만찬주일


    오늘은 세계성만찬주일(World Communion Sunday)입니다. 국경과 피부, 인종과 사상을 초월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성찬에 참가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고백하는 주일입니다. 세계성만찬주일의 유래는 1982년 페루의 수도인 리마(Lima)에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개신교와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의 교회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예식서인 ‘세례, 성만찬, 사역(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BEM)’이라는 소위 ‘리마 문서’를 내놓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리마 문서는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95개 조항에 견줄만한 세계 교회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문서로 평가받고 있는데, 특히 전 세계의 교회가 교리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어 주님의 성만찬을 함께 참여하는 것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잘 구현한 것으로 너무나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리마문서(BEM)의 정신을 살린 ‘리마 예식서(Lima Liturgy)’는 원래는 리마 총회를 위해 마련된 예배-예전으로, 리마문서를 통해 성취된 성만찬에 관한 신학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채택되었지만,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공감을 하며 차츰 광범위하게 확산, 수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세계교회는 매년 10월 첫째 주일을 성만찬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계 성만찬 주일의 의미는 전 세계의 교회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성만찬을 나눔으로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을 공유하면서 연대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1983년 밴쿠버 총회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세계 교회의 대표들이 주님의 성만찬을 공동으로 베푸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 날 성만찬 예전에 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대주교가 기도를 하고, 독일의 가톨릭 주교가 성서를 봉독했으며, 남인도 교회의 한 감독이 설교를 하고, 영국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가 성찬 예식을 집례 했는데, 이 성찬 예식을 보조하기 위해, 덴마크의 루터 교회, 인도네시아의 개혁교회(Reformed church)(미주 1), 서아프리카 베닌의 감리교회, 헝가리의 침례교회, 쿠바 바로 밑에 위치해 있는 자메이카의 모라비안 교회(미주 2)의 목사들과 캐나다 연합교회의 여성목사가 함께 하였습니다.

    이때 지금까지 설교 위주의 예배(개신교)나 성례전 우선의 예배(가톨릭)를 고집하던 교회들 모두가 말씀과 성례전이 엄숙이 묶여진 예배-예전의 가치를 경험하게 되었고, 전 세계의 교회가 예배-예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리마 예식서의 구성을 보면 ‘개회의 예전’, ‘말씀의 예전’, ‘성만찬의 예전’ 등 3부로 구성되어 있고, 35개의 작은 순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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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온라인 성찬을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가정 마다 개별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거나, 혹은 교회에서 준비하여 가정마다 배달하고 준비한 후 온라인 예배 때 성찬을 베푸는 것입니다. 면대면의 현장감은 비록 떨어지겠지만, 나름대로 성찬에 참여하여 온오프 라인 모두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을 공유하면서 연대의식을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성만찬주일을 맞아 이러한 성찬의 의미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한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창조하시고 바다와 땅의 모든 소산물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지음 받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온전히 알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주 말씀의 제목처럼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주께서 친히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셨다고 말씀드렸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곧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이렇게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조금 더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먹을 것을 주시며 언약을 맺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대로 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를 보내십니다. 따라서 서신서 말씀인 요한1서 말씀을 통해서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빛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으며 복음서 말씀은 이렇게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빛 가운데 거하기 위해 ‘말씀을 사모’하며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다음 주 말씀은 자연스럽게 자기 백성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먹여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구약 말씀을 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 초청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초청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먹을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쫓고 있죠? 따라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다시 초청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 2-3a)

    이렇게 우리의 몸과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언약을 약속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3b-5)

    ‘영원한 언약’,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만민의 증인이자, 인도자와 명령자로도 삼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알지 못하는 나라, 곧 이방 나라들을 불러 다윗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 언약이죠?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사무엘하 7장을 보면 다윗이 성전 건축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선지자 나단에게 이야기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그 때가 아님을 계시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에게 복과 은혜를 약속하십니다. 말씀을 찾아볼까요? 먼저 다윗 개인에 관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삼하 7:8-11a)

    그리고 이제 다윗 자손에 관한 축복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11b-16)

    여기서 다윗의 집과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말씀을 무슨 뜻일까요? 바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서신서 본문인 사도 요한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데,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3. 빛 가운데 거하기 위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 곧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듣고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지금 증언하겠다고 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며 이제 다윗의 후손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함으로 사도 요한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사귐과 기쁨을 누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3-4)

    여기서 사도 요한은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말씀하셨고, 또 요한이 들었던 바, ‘빛’으로 예수님(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요일 1:5)

    하나님(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에 거할 때, 우리의 죄를 계속 고백할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피가 끊임없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우리가 빛에 거하고 있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지키며 형제를 향한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행위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빛에 거하는 데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첫째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짓교사들의 그럴듯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빛에 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 두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은 그것을 ‘말씀을 사모하는 것’과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소개합니다.

    4.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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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다와 마리아


    먼저 말씀 사모에 관해서 살펴볼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르다의 집에 초청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38-40)

    오늘 세 본문의 맥락에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의 차이를 ‘봉사’와 ‘말씀 사모’로 구별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예수님을 초청한 마르다의 말씀에 대한 열심과 초청한 손님들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 했던 마리아 역시 동일한 맥락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말씀을 사모하는 것에 대한 권면이죠? 우리가 빛에 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주의 발치에 앉아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참된 말씀이 없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 본문 말씀이 아니라, 주변적인 개그와 우스개로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또 미신과 푸닥거리 수준으로 말씀의 생명력을 약화시킵니다. 따라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것을 잘 예언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11-13)

    5.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우리들이 빛에 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 두 번째는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들르셨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2-4)

    먼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며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도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을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 죄를 사해주시는 분, 시험에 들게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사해주시는 분을 만나는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생명의 말씀, 곧 창조주 예수님의 살과 피(삶과 죽음)를 먹고 나누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 시험에 들지 않고,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교회와 교인들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세계성만찬주일의 의미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군선교주일이기도 한데, 성만찬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이제 세상에 나아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힘쓰시는 십자가 군병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미주 1) 본래 모든 종교개혁 교회들은 ‘개혁되지 않은’ 또는 ‘변화되지 않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개혁교회’ 또는 ‘복음교회’라는 이름을 썼다. 이 개혁교회들 간에 성만찬을 둘러싼 논쟁이 있은 후(1529 이후), 루터 추종자들은 ‘루터파’라는 특수한 명칭을 사용했고, 따라서 개혁교회라는 이름은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교회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칼뱅주의 교회들은 대부분의 개혁교회가 교회 정치형태를 가리키는 데 쓰는 장로교회라는 말을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혁교회의 기원은 유럽의 칼뱅주의 교회이다. 우리나라의 ‘장로교회’는 이러한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다.
    (미주 2) 모라비아 형제회(Moravian Church)는 18세기 보헤미아에서 경건주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복음주의자들이다. 기원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허스(John Hus, 1373-1415)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의 후예들이 ‘보헤미아 형제단’이다. 이들이 후일 모라비아(Moravia)지방에서 왔다고 하여 모라비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보헤미아에서 살았던 이들 모라비안들은 1722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 독일의 드레스덴의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주하였다. 3년 뒤에는 1백명이나 되는 신도들이 영지로 이주했는데, 진젠도르프 백작 자신도 모라비안들과 기도회를 가질 정도로 모라비안의 경건주의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인 모라비안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청 제국, 페르시아, 북극 등에서 활발한 해외선교를 벌였고, 존 웨슬리의 감리교 창시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우유를 가공하여 만든 유가공품 제조 등의 노동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를 실천하였다.
    (미주 3) 삼성창(三聖唱)은 상투스(Sanctus)의 번역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다. 가령, 찬송가 8장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이 대표적인 삼성창이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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