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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4]

     




    < 1 >


    일부 근본주의적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회가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16세기 유럽의 교회개혁 시대에는 가톨릭교회가 개혁교회를 이단이라고 정죄했는데, 역설적인 일이지요. 자기가 믿는 진리, 혹은 전통에 반하는 언행을 하는 집단을 이단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왜 근본주의적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물었더니, 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숭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신도들이 마리아를 형상화하여, 그 앞에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면서 신격화한다는 것이지요. 가톨릭교회는 정말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숭배할까요?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사실 오랫동안 지속되어왔고, 한가지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거치면서 가톨릭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를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한 분이신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어머니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주장은 그리스도론 논쟁 가운데서 발생했습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낳은 예수님이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라는 고백이 그 배경에 있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예수를 낳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시다.’는 것입니다.


    주후 3세기부터 기도문들 가운데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는데, 이것이 에베소 공의회(431년)에서 의제로 다루어지다가, 433년에 안티오키아의 주교 요한이 모든 동방 주교의 이름으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부르는 것을 승인한 후,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그 결정을 재확인했습니다. 그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에서는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신다.”(교회헌장, 53항)라고 규정했습니다.


    두 번째 교리는 동정녀(Beata Virgine)라는 것입니다. 동정 잉태는 이성적으로나 과학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신비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마리아의 동정 잉태는 이사야서(7,14)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며,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눅 1,37)는 증거이자, 동시에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증명하는 징표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전통에서 ‘처녀’는 임신하지 않은, 다시 말해 ‘불임’과 연관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동정성’을 하나님의 아들을 탄생시키는 신비로 연결한 것입니다. 성경은 동정 잉태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거나, 성을 속된 것으로 여기는데 관심하지 않습니다. ‘동정’은 전적인 헌신과 봉헌을 의미합니다. 마리아의 동정 잉태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인간의 지고한 사랑과 순종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세 번째 교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Immacolata Conception)이라는 주장입니다. 마리아는 잉태는 물론 태어날 때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에 물들지 않았기에,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세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콜라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는 ‘마리아의 무죄성은 하나님 은총의 덕으로 그리스도의 보편적 중개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하나님은 결코 한순간도 마리아를 원죄에 지배받지 않게 하실 수 있었고, 그렇게 원하셨으며, 그렇게 하셨다’(potuit, voluit fecit)고 주장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는 마리아의 원죄 없음을 확인하였고, 비오 9세 교황은 회칙 ‘형언할 수 없으신 하나님’(Ineffabilis Deus)에서 1854년 12월 8일에 ‘천주의 성모 동정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교의로 선포했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네 번째 교리는 ‘하늘에 오르신 분’(Assumptio)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능동적으로 승천하셨다면,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하늘에 불려 올려졌다는 것이지요. ‘성모승천대축일’(8월 15일)도 있고, ‘성모승천기념교회’라고 이름 붙은 성당들이 많이 있는 것도 이 교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제260대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는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나님’(Munificentissimus Deus, 1950년 11월 1일)에서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성좌의 고유한 권위에 따라,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다음,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교의를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공언하고 선언하며 분명히 정의하는 바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첫 회칙, ‘복음의 기쁨’에서 성모에게 드리는 기도문을 제시했는데, ‘부활의 열정을 저희에게 주시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복음을 모두에게 전하게 하시고, 새로운 길을 찾는 거룩한 용기를 주시어 결코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움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다다를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하여, ‘새로운 복음화의 별‘로서 교회를 이끄시는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4가지 교리를 종합하면, 성모 마리아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모든 신앙인의 어머니’, ‘원죄없는 잉태로 구원사에 동참한 인간’, ‘하나님께 순명한 신앙의 모범’이자, ‘승천’을 통해 구원의 희망을 전한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 2 >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네 가지 교리는 개신교 신도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특별히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교리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와의 신학적 대화를 해 온 가톨릭 교의학자 심상태 교수(수원 가톨릭대학교)는 마리아 숭배 또는 공경의 타당성을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온 인류와 세계를 위한 구원사적 기능을 수행한 데서 찾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성육신 사건에 어머니로 참여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 자의적으로 적극 협력했으며,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順命)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했다. 따라서 교회가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께 바치는 공경인 흠숭지례(欽崇之禮)보다 낮으나 일반 성인들에게 바치는 공경지례(恭敬之禮)보다 한층 높은 상경지례(上敬之禮)로 마리아를 각별히 공경함이 지당하다’는 것이지요.


    세계교회협의회(WCC)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마리아의 완전한 의탁, 마리아의 활동적 신앙의 반응, 그리고 마리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교회의 유형과 모범으로 여겨진 것’이 그 배경이었다고 해석합니다(하나의 신앙고백, 1990).


    그리고 마리아 교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해방신학과 여성신학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숭배는 강렬하다고 합니다. 여관 주인에게 거부당한 임산부 마리아의 모습, 폭력에서 도피하는 장면, 자신의 아들을 조용히 어른으로 키우는 여인, 그의 학대와 고난을 증거하고 그의 승리에 동참하는 모습 등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과 일치의 표본인 마리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라고 합니다.


    < 3 >


    그렇다면 교리가 아니라, 신약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마리아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3-1.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누가복음을 따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조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복음서인 마태는 비록 짧지만 주목할 만한 요셉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요셉이 약혼 중에 자기 자식이 아닌 아기를 임신한 마리아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부장제가 지배하고, 율법의 엄격한 준수가 도덕적 행동의 규범이었던 당시 유대사회에서 요셉의 태도는 분명히 이해하기 어렵고, 낯선 것이었습니다. 물론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 1,20-21)라고 말한 것이, 약혼녀 마리아가 간음한 것은 아닌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고, 격분했을 요셉의 마음을 돌이켰음을 추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가만히 파혼하려고 생각한’(마 1,20) 이 후의 일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영역은 ‘as he considered this’, 독일어는 ‘als er das noch bedachte’로 번역하여, ‘파혼을 고려하다, 숙고하다’는 의미로 번역했지만,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어근, ‘thymos’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서에 단 한 번 등장하는데, 회당에서 회중이 일어나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할 때, 회중이 품었던 ‘격노’를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눅 4,28).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이 말을 동사로 사용한 사례는 단 한번,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이 아기가 태어난 곳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베들레헴을 떠난 것을 알고 헤롯이 ‘몹시 노하였다’는 말에서 나옵니다(마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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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yzantine Icon, 「Our Lady of Perpetual Help」 (13세기 혹은 14세기) ⓒWikipedia


    그렇다면 임신한 약혼녀 이야기를 들은 요셉이 조용히 앉아 이 문제를 ‘생각하거나, 숙고했다’는 것보다, 깊이 상심한 채 분노했다는 것이 헬라어 원문을 오히려 더 정확히 번역하고, 요셉의 인간적인 모습을 더 잘 포착한 번역이라고 주장하는 케네스 베일리는 정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불같이 일어나는 의혹과 상심, 짓밟힌 체면과 분노를 요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마태는 단지 ‘그가 의로운 사람인지라, 마리아에게 치욕을 안겨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심했다’고 전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의로운 사람’은 일반적으로 율법에 순종하고, 규칙을 공평하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신명기 22장 23절이 규정한 율법에 따라, ‘약혼한 처녀가 성안에서 남자를 만나 동침하면 둘 다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는 율법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義)를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의’를 율법이 기대한 윤리를 뛰어넘어,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푸는’ 주님(이 42,2-3)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에게 ‘의’는 남편으로서의 자기 권리의 주장이 아니라, 권리를 박탈당한 여성, 상처입고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우유부단하고, 할 말도 못하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파혼할 권리도 있었고, 약혼녀를 고소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온 동네의 반대를 물리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을 만큼 담대함과 배포와 용기와 굳센 인격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율법적 규범을 뛰어 넘을 만큼 사랑에서 비롯된 강한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한 사람, 그가 의로운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사회적, 법적 권리의 관철이 아니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약혼녀, 임신한 마리아에 대한 배려는 호적등록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 중동에서는 공식적이거나 율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남자가 자기 집을 대표합니다. 요셉은 호적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혼자 가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마리아와 함께 간 것은, 나사렛에 홀로 남아있을 마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설명입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변부로 밀려난, 메시아 탄생 이야기의 조역에 머물러 있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사랑과 대담한 용기가 없었다면, 마리아는 돌아 맞아 처형되었을 것이고, 예수님은 태어나지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3-2. 그런데 마리아는 스스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수동적으로만 등장하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를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역으로 전면에 등장시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오히려 요셉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마리아의 그늘 뒤편에 서 있을 뿐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수태 고지를 요셉이 아니라, 그의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합니다.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말도 요셉에게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합니다. 누가에는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순종하여,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 1,38)고 말합니다. 임신을 못하는 나이 많은 엘리사벳에게 수태고지는 축복이었지만,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는 위험한 저주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의 목숨을 어떻게 위협할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다만 순종합니다. 이로써 마리아는 영원한 성모, 거룩한 어머니로 아브라함을 이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그들이 들은 말을 전해주었을 때에도, 그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긴 사람도 마리아였습니다(눅 2,19).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는 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간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린 소년 예수를 찾으러 나섰다가, 부모님은 성전에서 선생들과 함께 토론하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놀란 부모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말한 소년 예수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고 합니다(눅 2,51).


    지혜와 키가 자라면서 튼튼하고, 총명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는 장남(눅 2,40; 2,52), 아들 예수를 둔 것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도 그러듯이 –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마리아가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은, 시므온의 예언입니다.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만난 시므온은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눅 2,34-35)라고 예언했지요.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사람들의 ‘칭찬받는 표징’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이 사람들의 ‘비방 받는 표징’이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성장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을 때, 어머니 마리아와 ‘가족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막 3,21)고 합니다. 예수님이 무리와 함께 계실 때, 그를 찾아간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물으시며,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 3,33-35)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어머니 마리아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래로 동생들이 최소한 대 여섯 명이 되었을 가족의 장남, 어머니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데, 장가도 안가고, 하나님 나라 운동한다고 가출하여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예언자로 나서서,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아들을 아마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아들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 율법으로 저주받은 자, 로마 제국의 정치범으로 형을 받아 죽어가는 십자가 아래에 서게 되었을 때, 마리아는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에서 한 시므온의 예언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장차 이 아들의 일로 마치 칼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3-3.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들 때문에 얻는 기쁨과 자녀들 때문에 겪는 고통의 전형입니다.


    첫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마리아는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고, 자기 아기 때문에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들이 모두 헤롯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들어야했습니다(마 2,16). 한 편에는 아들을 얻고 기뻐하는 마리아, 그 반대편에는 자식을 잃고 위로받기를 거부하며 통곡하는 라헬이 있습니다(마 2,18).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해마다 축하하는 것처럼 그렇게 목가적이고, 행복한 사건이 아닙니다.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폭력과 살육의 사건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도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탄생과 죽음의 사건에서 드러나는 이 잔혹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구속하러 오신 악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은 어머니 마리아가 자신이 겪은 고난을 통해 반드시 구속받아야 할 악을 드러내는데 동참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아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악을 구속하는 길, 그것은 더 큰 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철저한 자기 비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사렛의 비천한 여종의 몸을 빌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한계와 죄와 악함을 스스로 짊어지신 하나님, 고통 받는 하나님만이 악을 구속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역설입니다.


    한 편으로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그를 낳은 어머니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찬미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식들을 잃고 위로받기를 거부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자식을 먼저 가슴에 묻어야 했던 모든 어머니들의 슬픔과 고통, ‘세월호’ 희생자의 어머니들, 지금도 전쟁과 테러로 목숨을 잃는 이들의 어머니들을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곳, 바로 그곳이 여관에는 들어갈 방이 없어(눅 2,7) 마리아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과 지금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하나님의 어머니, 모든 인류의 거룩한 어머니로 고백되는 것이지요.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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