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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 뒤에 감추어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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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2]


     


    < 1 > 


    20세기 초, 인류 최고 관심의 하나는 극지탐험이었습니다. 서구 세계는 각 국가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다투어 극지 탐험에 나섰고, 극지탐험은 개인의 탐험심과 영웅주의, 애국심과 국가 사이의 경쟁심이 합류하여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중세 유럽의 십자군처럼 지구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탐험대가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피어리(Robert Peary, 1856-1920)가 북극을 향해서 나아갔고, 남쪽으로는 두 척의 배가 항해를 해갔습니다. 한 척은 노르웨이 사람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이, 다른 한 척은 영국인 로버트 팔콘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이 지휘하는 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남극을 정복한 사람은 아문센(1911년 12월 19일 남극점 도달)이었습니다. 스콧은 아문센보다 한 달 늦게 남극에 도착함으로써(1912년 1월 17일) 정복의 역사에서 실패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아문센보다 스콧을 더 위대한 영웅적 탐험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대부분 나중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문센은 북극으로 간다고 해놓고 비밀리에 남극으로 배를 돌렸다가, 후에 비난이 일자 남극을 거쳐 북극을 가는 것이라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리더십에 불만을 제기한 동료 요한센과 남극을 떠나자마자 결별하고 그를 매도하여 마침내 자살하게 했습니다. 비교적 쉬운 코스의 지름길을 선택했다는 것도 아문센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짙은 그림자를 남겼습니다.


    역사가 스콧을 더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 그의 경쟁자였던 아문센이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출세욕에 사로잡힌 소인배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역사는 명백하게 실패한 인물인 스콧을 더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하는 것일까요?


    스콧은 처음부터 남극의 최초 정복에만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남극에 대한 과학적 탐사도 중요한 탐험의 목적이었기에, 아문센이 동시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스콧은 서둘러 극점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항해를 하다가도 새의 기원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줄 펭귄 알을 얻기 위해 혹독한 추위와 암흑 속에서 5주간의 탐험을 감행한 것도 그의 목적이 단순히 남극정복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남극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길을 여는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력을 다해 마침내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경쟁자인 아문센이 이미 깃발을 꽂아놓고 철수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실패의 결정적 요인은 예기치 않은 기상변화, 연료부족과 굶주림 때문이었습니다. 네 명의 동료들과 살아서 귀환할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동상에 걸린 몸과 남은 식량을 썰매에 실어도 부족할 판에, 스콧은 지질학계에서 의문으로 남아있던 비어드모어 빙하 지대의 암석 지질을 밝혀줄 암석 표본 14kg을 썰매에 실었습니다. 비록 정복의 역사에서는 패배했지만 그는 자기 조국 영국과 인류에게 남극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길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스콧은 1911년 11월 1일 남극점을 향해 출발, 이듬해 1월 17일 남극점을 밟았지만, 아문센보다 한 달 늦게 도착, 정복의 역사에서 실패한 후, 지옥 같은 악천후 속에서 귀환하다가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얼어 죽을 때까지 썼던 일기의 마지막 날짜는 1912년 3월 29일이었습니다. 5개월에 걸친 2,500km의 긴 탐험의 끝은 대원 모두의 죽음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4명의 대원 가운데 에드거 에반스 해군 중사는 뇌를 다쳐 죽고, 오츠 대위는 자신의 동상으로 다른 동료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눈보라 속으로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어 나갔습니다. 며칠 후 스콧과 나머지 두 명의 대원도 모두 얼어 죽었습니다.


    8개월 후, 시신 발굴에 나선 영국 수색 팀은 1912년 11월 12일, 스콧과 그의 다른 두 동료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수색 팀의 한 사람인 체리 그래드는 그들이 스콧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의 왼쪽 손은 그의 평생 친구였고 의사이자 동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을 향해 뻗어 있었고, 내일 죽어도 오늘 기상학 표를 작성하고 죽을 사람으로 불린 기상학자 보우어는 손을 가슴에 포갠 채 조용하게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콧의 가슴에는 그가 죽기 직전까지 써내려간 일기와 그의 두 동료의 아내에게, 영국 정부와 국민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콧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테라노바 호를 이끌고 남극탐험에 나서면서부터 그가 죽기 직전까지 써내려간 이 ‘남극 일기’는 25명으로 구성된 스콧 탐험대의 애국심, 희생과 헌신, 초인적인 용기와 인내심, 절망적 상황에서도 꿋꿋한 책임감, 영웅적 우정에 대한 위대한 인간승리의 감동적인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고, 바로 이 ‘남극 일기’, 한 권의 책만으로도 스콧은 명백한 실패를 가장 위대한 인간승리로 승화시킨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해가지지 않는 나라,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은 적이 없는 대영 제국의 국왕이 해군 대령 출신 탐험대장 스콧의 장례식에서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진정한 영국인을 하나님께 보낸다.’ ‘진정한 영국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누가보아도 명백한 실패를 위대한 인간승리로 승화시킨 사람, ‘영웅적인 죽음으로부터 삶이 솟아나고, 몰락으로부터 무한으로의 상승의지가 솟아난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 ‘성취와 성공이라는 우연성에만 집착하며 불타오르는 명예욕에 사로잡힌 소인배’가 아니라, ‘일이 비록 우리의 기대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고개를 숙이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비록 몰락했지만 ‘이길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한 힘에 맞서 싸우도록 장엄하게 인간의 심정을 고양시킨 사람’입니다.”


    로버트 팔콘 스콧은 20세기 초, 명백하게 실패했으나 결코 실패하지 않은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실패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고 참으로 본질적인 것은 바로 실패 이후의 삶입니다. 삶의 진정성, 한 인간의 인격은 실패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실패 이후, 그가 그것을 어떻게 새로운 차원의 인간승리로 이끌어 가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스콧은 애국심과 영웅적 동료애, 죽기 직전까지 써내려간 일기를 통하여 명백한 패배를 위대한 인간승리로 승화시킨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 2 >


    저는 스콧 대령의 삶을 회상하면서, 베드로를 연상했습니다. 베드로도 분명히 신앙의 역사에서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맹세까지 한 그였지만, 그는 대제사장의 집 바깥뜰에서 한 여종의 추궁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으며, 심지어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주님을 알지 못한다.”(마 26,74)고 말했습니다. 그 때 곧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고 합니다(마 26,75).


    이 사건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성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무력한 메시야에 대한 절망감으로 이스카리옷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베드로는 다시 갈릴리 호숫가의 어부로 되돌아갔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이전의 일상생활로 되돌아갔습니다. 평범한 어부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했던 그 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한 삶의 놀라운 변화와 그 분이 보여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도 갈릴리 호숫가의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고(마 8,14-15),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내시고,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축복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과 함께,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의 환호성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던 일들도 이제는 아득한 추억으로만 남았을 뿐입니다. 어린이와 여인들, 병자와 죄인들과 더불어 새 하늘 새 땅을 노래하며 오르던 시온의 언덕도 이젠 흐르는 눈물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졌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과 함께 잠시나마 물 위를 걸었지만, 강풍이 무서워 물에 빠졌던 기억(마 14,28-51),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을 때, 엄습하는 졸음을 어쩔 수 없어 함께 깨어있지 못했던 아픈 기억(마 26,40)들이 가슴을 헤집고 치밀어 올라왔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 나는 역시 어쩔 수 없어.’

    ‘아무리 새로 시작하려고 해도 언제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을 뿐이야.’

    ‘나는 나 자신을 도무지 변화시킬 수 없어.’

    ‘세상은 우리가 바꿀 수 없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강해.’


    사람을 좌절시키는 외적인 요건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입니다. 객관적인 요인이야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할 수 있지만, 자신에 대한 절망은 스스로를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의 마지막은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을 포기할 때입니다.


    자괴감과 절망은 베드로를 다시 갈릴리 호숫가의 어부로 되돌아가게 했습니다(요 21,3). 그런데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아침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의심하고 배신한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식탁 교제에 초대하셨으니 말입니다. 제자들은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요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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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irolamo Troppa, 「The Apostle Peter」 (1665-1668) ⓒWikipedia


    그리고 식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세 번의 물음은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을, 참으로 되돌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아픈 기억을 되살려냈을지 모릅니다. 근심스런 눈빛으로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에게 “내 양 떼를 먹여라”(요 21,1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베드로는 그 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순결한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고, 지혜롭고 지식이 많은 요한이 아니라, 왜 하필이면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의심 많고, 다혈질적이고, 신앙의 역사에서 명백하게 실패한 베드로라는 이름 위에 왜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실패한 신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패를 통하여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종종 나쁜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좋은 사람에게도 때로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이나 실패 그 자체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란 실패 속에서 절망한 자아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실패했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자책감으로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인정하고 그 실패 뒤에 감추어진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겸손하게 헤아려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신을 여는 일입니다. 우리가 실패할 수 있는 약한 존재라는 것, 우리 힘만으로는 자책과 절망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명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실패에 머물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두시지 않습니다. 시련은 우리를 더 깊은 하나님과의 사귐에로 이끌기 위한, 우리의 믿음을 더 크게 하기 위한, 그리하여 이미 예비하신 큰 복을 주시기 위한 시험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이란 성공했을 때 더욱 겸손하고, 실패했을 때 더욱 감사하는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진정한 신앙인은 옛 것을 이미 지나간 것으로 여깁니다. 더 이상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거나 의식을 짓누르게 하지 않습니다. 새로워진 존재를 기뻐하면서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주님의 미래에로 나아갑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5-39).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실패의 한 복판에서, 아니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소망의 근원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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