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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속의 거룩시간 속의 지성소(신명기 5,12-15; 누가복음 23,5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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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란 변함없이 늘 그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개념은 엄격한 의미를 담고 있고 있어서 현실과는 큰 차이를 보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변함없이 있는 것은 없음에도 우리는 그러한 것이 있는 양 일상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 있고 그 변화를 통해 지속됩니다. 등교하는 길도 매번 다르고 회사에서 일하는 상황도 매일 다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일상으로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거나 눈치 채기 어려운 어느 정도의 변화는 우리의 인식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고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늘 새로운 일들이 발생하지만, 새로움에 무뎌져가는 것이 우리의 인식패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낯익은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낯익은 장소를 벗어나 새롭고 특별한 것을 찾습니다.


    이러한 일이 성서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특별한 것은 먼저 시간과 관련하여 일어나는데, 그 시간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란 분리된 시간으로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영원 속에 계시던 하나님은 영원이란 변함없는 시간(!)의 흐름을 끊고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그 안에 우리 사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시간에 하나님은 일하셨고 이어서 쉬셨습니다.


    그 쉼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였고, 그 후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세상을 보존하시기 위해 다시 일하십니다. 이로써 쉬는 시간은 일하는 시간과 구분되었고, 그 시간을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이란 구별 내지 분리를 함축하고 깨끗함 또는 순전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거룩한 그 시간은 훗날 안식일로 불립니다.


    또 다른 특별한 것 하나는 공간적인 것으로 회막/성전 안의 지성소입니다.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과 철저하게 구분된 장소입니다. 이를 시간과 관련해서 비유적으로 사용하면, 안식일은 시간 안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유능력이 작아 다 생각할 수 없어 하나님이 쉬는 것을 연상하기 어렵지만, 영원의 신비를 걷고 시간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다시 그의 ‘시간’인 영원 속에 머무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안식일은 영원과 시간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일하는 나머지 일상의 시간은 안식일을 매개로 영원과 잇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그 날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일하는 시간으로부터 쉬는 그 시간이 구별되고, 그 구별의 표지는 바로 쉼입니다. 쉼이 그 시간을 거룩하게 합니다. 쉼 이외에 그 시간을 거룩하게 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쉼에서 하나님의 영원을 바라봅니다. 영원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신명기의 본문은 안식일 제정의 이유를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경험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출애굽기 본문이 그 이유를 창조 후 하나님의 안식에서 찾는 것과 다릅니다. 종에게 시간은 일하는 시간뿐입니다. 그에게 쉬도록 구별된 시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시간으로 형상화하고, 그 시간 속에서 해방을 기억하고 자유인임을 자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본문이 이집트 종살이 경험을 끌어내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의 이스라엘은 신분제 사회와 닮아 있어서, 그 사회에는 종도 있고 일하러 온 외국인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쉼을 주는 것이 안식일 제정의 최종 목표입니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의 수신자들은 종을 부리고 일감을 주는 주인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주인들에게 과거의 종살이 경험을 일깨움으로써 그들이 쉼을 고대하는 종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안식일을 지켜 일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쉼을 주도록 하려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고 하십니다. 그 쉼의 시간은 주인이나 종이나 누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에 잇댄 그 시간 속에서 사람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에게 존중받는 그 시간은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영원함이 있습니다.


    그 시간의 거룩함이 일로부터의 쉼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 시간을 더럽히는 것은 당연히 그 쉼을 거부하고 일을 강제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탐심이 그 시간을 더럽게 하는 배후입니다. 탐심이 영원에 대해 눈멀게 하고 거룩을 침범하게 합니다. 역으로 안식일은 그 탐심을 들여야 보게 하고 탐심을 잠시나마 내려놓게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이런 안식일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짐작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준비하는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무덤에 안치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은 예수의 몸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고 안식일에는 쉬었습니다. 그들과 예수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그러나 함께 그날 안식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새벽에 무덤을 찾았고 예수께서는 그 새벽에 무덤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주일로 지킵니다.


    예수의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과 비교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셨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요 19,30)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다시 제자들과 만나 일을 계속 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시며, 사람 살리는 일은 안식일에도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셨고 안식일의 쉼과 해방에 종들만이 아니라 병자와 장애인과 약자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무덤에서 안식일을 지키셨고, 이와 함께 그 무덤은 쉼과 생명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과 차이가 있지만, 그 의미와 내용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땅(공간)의 역사(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그 일상적 시간과 구별된 이 시간 주일을 지킵니다. 우리에게 이 날은 영원에 잇댄 시간으로 하나님의 영원을 느끼며 사람됨을 회복하는 시간입니까? 쉼과 생명을 낳고 존중하고 존중받는 시간입니끼? 시간과 영원이 만나듯 화해가 일어나고 사랑으로 거룩하게 되는 시간입니까? 그러한 시간이기를 빕니다.


    시간 속의 지성소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롬 3,25). 그 지성소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가운데 그 지성소가 있습니다. 은총의 그 자리에서 희년과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우리이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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