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전태일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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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를 외쳤던청계 피복 전태일(23세) 청년 노동자의 분신 50주기를 맞이한다. 이에 한국민중신학회와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영등포산업선교회, 전태일기념관, 전태일50주기범국민행사위원회, 심원안병무기념사업회가 연합하여 '전태일 50주기 개신교 심포지움'이 지난 11월 5일 6시 30분에 기독교회관 2층에서 있었다.
이날 발표는 박승렬소장(NCCK 인권센터)의 사회로 NCCK 인권센터 이사장 홍인식목사와 이수호 전태일재단 상임대표의 환영사가 있었다. 주제 발표는 최형묵 박사(한국민중신학회)와 손승호 박사(NCCK100주년기념사업특별위원회) 오세요목사(한국민중신학회)가 했다. 당시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기독학생운동이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된다.
이날 토론에서는 노동자 출신으로 조합간부를 지낸 바 있는 영등포산선의 쉼힐링센타 홍윤경소장과 하성웅총무(한국기독청년협의회)가 참가했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눈으로 바라본 전태일에 대하여 발표했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으로 인하여 태동된 민중신학과 기독교인권운동,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체 우리시대 20대 청년들의 사정을 들었다.
기독교신앙에서 노동문제를 응답한 산업선교(URM)와 억눌리고 빼앗긴 이들의 생존권을 위하여 함께한 인권운동이 과거와 갖지는 않치만 여전히 그 과제는 유효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발표내용중 E랜드에서 노조활동을 했던 영등포산선의 홍윤경소장의 원고만 소개한다.
* 발표자들 왼쪽부터 하성웅총무, 홍윤경소장, 박승열, 최형묵, 홍인식목사, 이수호상임이사
홍윤경(영등포산업선교회 쉼힐링센터, 소장)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던 1987년 봄,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시위에 나가지 않았다. 비운동권 선배들도 모두 시청 앞으로 나가던 때였지만 나는 기도했고, 캠퍼스에서 전도에 힘썼다. 선배가 되어서는 복음동아리에서 후배들을 양육했으며, 4학년 여름방학 때는 아프리카로 단기 선교여행을 다녀왔다. 내 꿈은 평신도 선교사였다. 졸업하면서는 당시 한창 수요가 늘고 있던 전산을 전공했기에 대기업에도 갈 수 있었지만 기독교기업이라는 이유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랜드에 입사했다. 그러나 입사 후 3년만인 1993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이랜드노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데모 한번 나가지 않고, 노조의 노자도 몰랐던 내가 노조 부위원장이라니~!! 어찌 보면 삶이 방향이 완전히 바뀐 듯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진정한 평신도 선교사의 길이었다.
내가 스스로 노동자라는 인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꼈던 곳은 바로 전태일의 후예들이 만든 청계피복노조였다. (지금은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얼떨결에 부위원장이 된 뒤 처음 참석한 노조 간부수련회가 청계천 어느 허름한 아파트형 공장 안에 있던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이었다. 그곳에서 여러 의류 사업장의 선배 노조 활동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얘기를 듣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전태일 정신이 그곳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까?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하고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비로소 내가 노동자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여지껏 그걸 모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날의 경험으로 나는 해고될 때까지, 아니 해고된 후까지 17년간 노조 간부의 길을 걸었다. 이랜드는 “성경에 노조는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끊임없이 노조를 탄압했기에 노조는 항상 어려웠고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위원장, 사무국장, 홍보실장 등 이런저런 간부를 맡아서 3번의 장기파업, 용역깡패의 폭행, ‘사탄의 무리’라는 지탄, 해고와 복직, 다시 재해고, 손배 가압류, 구속 등을 겪으며 어느새 노동운동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평신도 선교사의 삶이 바로 노동조합 활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풀고, 권리 신장을 위해 뭉쳐서 투쟁할 수 있는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복음과도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일하는 영등포산업선교회 초대 총무이신 조지송 목사님은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이 교회다”고 하셨다는데, 정말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말씀이다. 노조 활동을 하던 중 2007~2008년에, 영화 ‘카트’의 소재가 되었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파업투쟁을 하게 되었다. 2007년 당시 이랜드가 인수한 까르푸(홈에버) 직원들의 임금은 정규직도 연1,500만원, 비정규직은 연 1,000만원 정도였다.
당시 최저임금이 3,480원이었으니 최저임금 위반은 아니지만 하루종일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면고 서서 일해서 하지정맥류와 방광염에 시달리고, 고객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조건을 생각하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는 임금인상이 아니었다. 이 임금으로라도 자르지 말고 계속 일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법은 어려워서 잘 모르지만 비정규직을 위한다는 법 때문에 오히려 잘린다니, 너무나 억울했기에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냈던 것이 510일이나 이어지는 파업투쟁이었다.
그 선봉에 서 있던 나는 투쟁이 고착상태에 빠져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왜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내 한 몸 불살라서 투쟁이 승리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절박한 마음, 하루하루 조합원들의 피눈물을 바라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 감히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전태일과 비슷한 마음을 품었다고 느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당시는 전태일의 역사적 항거 후 37년이 지났을 때지만 헌법이 보장한 파업에 경찰력이 투입되었고, 용역깡패들의 폭력은 용인되었으며, 나는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최형묵 박사의 지적대로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한 국제적 규범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현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2020년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어떤 측면에서 전태일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열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현재를 대표하는 몇가지 어려움을 살펴보겠다.
먼저 자신이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노동자성의 상실은 어쩌면 전태일 시대보다 더 후퇴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로 대표되는데, 첨단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세분화되고 종속화되는 경향을 띤다. 이와 연결되는 특징 중 하나가 노동의 개별화, 파편화인데 이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로막아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최형묵 박사가 발제문에서 여러번 언급한 노동유연화 즉, 정리해고, 비정규직, 외주화의 문제는 대표적인 사회 문제가 된 지 오래되었고, 대통령이 일부 문제에 대한 해결 선언까지 하였으나, 별 진전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또 노동조합은 노동자 투쟁의 구심으로서 그 사회적 역할이 적지 않은데, “노조는 집단이기적이고 지나치게 과격하다”, “귀족 노조가 경제를 망친다” 등의 편파적 인식으로 노조를 폄하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최근에는 더욱 교묘하고도 악랄하게 노조를 탄압하는 신종 노조탄압 방법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노조를 탄압하는 기업에 대한 관대함도 여전하다.
이렇게 보면 상황은 비관적이다. 최형묵 박사가 지적한 대로 아직 노동배제체제가 노동포용체제로 전환되지 못했고, 노동자의 인간선언도 실현되지 못했다. 전태일을 비롯한 여러 노동자들이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부르짖었고, 전태일 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의 자각과 저항(투쟁)이 이어졌지만 그들의 헌신에 비해 결과는 미미한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더구나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노동자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한 ‘전태일 50년’, 우리는 어떤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일까?
그의 죽음은 50년이 지난 지금,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고민 속에서 오세요목사의 주장은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전태일에게 말할 기회를 주자!”, 이는 손승호 박사가 제기한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던 전태일 의 인간적이고 다양한 면모를 들여다보면서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난 50년간 전태일에게 덧씌우고 있던 열사로서의 무거움과 소명의식만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지 않을까?
이를 다시 말하면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전태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곁의 한 사람 한 사람, 지금 피땀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명 한 명이 바로 전태일이고 전태일의 친구다. 바로 옆 전태일의 이야기를 전태일의 마음을 가지고 귀담아 듣는 것, 그리고 그 전태일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투쟁의 실천을 해나가는 것, 이것이 기독 청년 전태일을 가장 깊게 기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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