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운영委, 문준경 전도사 순교70주기 추모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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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데일리굿뉴스|
작성일2020-10-23 |
조회조회수 : 3,2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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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운영위원회(위원장 안성기 목사)는 지난 10월 13일 전남 신안군 증도면 소재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제70주기 문준경 전도사 추모예배를 드렸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운영위원회는 지난 10월 13일 전남 신안군 증도면 소재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제70주기 문준경 전도사 추모예배를 드렸다. ⓒ데일리굿뉴스
이날 추모예배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전전 총회장 이재완 목사(영도교회 원로), 부총회장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를 비롯해 지역 목회자들과 성도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찬송과 함께 시작됐다.
이날 예배에서 지형은 목사는 ‘그러므로 힘써 지킵시다’(엡 4:1~10)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문준경 전도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이었던 동존상잔의 현장에 계셨지만 기독교의 평화와 사랑으로 하늘의 정원을 만드셨다”면서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용서했듯 용서와 화해의 거룩하고 소중한 유산을 삶으로 헌신하며 따라가자”고 전했다.
문전도사는 1891년 신안 암태도에서 출생해 1927년 36세에 목포 복교동교회에 입교한 후 섬마을 전도자로 한 평생을 살았다. 이후 문 전도사는 임자도 진리교회를 시작으로 중동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전남 신안군에만 10곳 넘는 교회를 세우며 증도 복음화의 기틀을 닦았다.
그 영향으로 현재 신안 지역에만 100여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문 전도사는 1년이면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마을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위로자로, 병자에게는 의사, 산모에게는 산파역할을 감당하는 등 늘 헌신적으로 섬겼다.
문 전도사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섬 마을에 들어온 북한군을 상대로 끝까지 교인들을 보호하고 신앙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증도리 앞바다 갯벌에서 공산당에 의해 처참하게 순교 당했다.
그의 순교 정신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지환 교회기자(흑산제일교회)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운영위원회는 지난 10월 13일 전남 신안군 증도면 소재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제70주기 문준경 전도사 추모예배를 드렸다. ⓒ데일리굿뉴스
이날 추모예배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전전 총회장 이재완 목사(영도교회 원로), 부총회장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를 비롯해 지역 목회자들과 성도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찬송과 함께 시작됐다.
이날 예배에서 지형은 목사는 ‘그러므로 힘써 지킵시다’(엡 4:1~10)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문준경 전도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이었던 동존상잔의 현장에 계셨지만 기독교의 평화와 사랑으로 하늘의 정원을 만드셨다”면서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용서했듯 용서와 화해의 거룩하고 소중한 유산을 삶으로 헌신하며 따라가자”고 전했다.
문전도사는 1891년 신안 암태도에서 출생해 1927년 36세에 목포 복교동교회에 입교한 후 섬마을 전도자로 한 평생을 살았다. 이후 문 전도사는 임자도 진리교회를 시작으로 중동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전남 신안군에만 10곳 넘는 교회를 세우며 증도 복음화의 기틀을 닦았다.
그 영향으로 현재 신안 지역에만 100여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문 전도사는 1년이면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마을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위로자로, 병자에게는 의사, 산모에게는 산파역할을 감당하는 등 늘 헌신적으로 섬겼다.
문 전도사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섬 마을에 들어온 북한군을 상대로 끝까지 교인들을 보호하고 신앙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증도리 앞바다 갯벌에서 공산당에 의해 처참하게 순교 당했다.
그의 순교 정신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지환 교회기자(흑산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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