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성경읽기(43) - 제 몫을 다하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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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 크리스찬투데이|
작성일2020-07-03 |
조회조회수 : 3,6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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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 예물, 예배 도우미의 세 가지 몫을 다하는 일상이면 좋겠습니다.
▲ 목축하는 이가 제물로 바칠 희생물을 고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예물 자체는 어떤 면에서 예물바치는 이 자신이었을 것이다.
온라인 예배, 비대면 예배 등 전혀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참된 예배자’, ‘진정한 예배’, ‘예배의 회복’, ‘삶으로서의 예배’ 등 그동안 주고받았던 대화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지만, 이런 관심사를 마주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성경이 레위기입니다. 레위기만큼 ‘예배드림’, ‘예배함’, ‘예배자’에 대하여 좋은 길잡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예배, 하나의 제사드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무엇일까요? 제사드리는 이, 제물, 제사장, 제물 받는 이 이 네 가지인 것 같습니다. 마을에서 드리던 제사도 그렇고 집안에서 지키던 차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실패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오늘 우리의 예배함을 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제물로 바쳐진 희생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 간에 덮인 꺼풀 등은 테워야 했다. 그것을 하나님이 향기로운 제물이라며 받으셨다.
성경 속으로
레위기 1-3장의 다양한 제물드림 이야기에서도 이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제물, ‘제물드리는 이’, ‘제사장’, 이 제물 드림에서 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방송으로 촬영한다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방송 분량이 가장 많은 존재는 무엇일까요? ‘제물드리는 이’입니다. 제사장이 아닙니다.
제물은 누가 선택하나요? 제물을 성막으로 누가 데려오나요? 누가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나요? 누가 그 제물을 잡나요? 누가 그 제물을 고기 부위별로 그리고 버릴 것과 태울 것을 구별하나요? 제사장인가요? 아닙니다. 제물 바치는 이입니다. 양이나 염소, 암소나 수소를 잡을 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그 노동은 얼마나 힘든 노동이었을까요? 자신이 아끼던 양과 염소, 소 가운데 골라서 제물로 바치는 이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고대 이집트에서 그리고 전통 사회에서 제물을 바치는 이는 제주 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사장인 것이지요. 이 역할은 하나의 권위이고 권력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제사에는 왕이 제사드리는 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을 제사에서는 마을 어르신이 맡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고대 이집트에 살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제물 바치는 제사장의 권위 가득한 모습을 보았을 듯합니다. 절대권력자로 알려진 파라오 같은 존재였고, 폼나는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백성에게, 제물 바치는 이에게 절대적인 몫을 맡깁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것입니다.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던 행위를 제물바치는 이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이?“, ‘내가?’ 같은 바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물 바치는 이 훈련 과정을 이수하면, 나중에 제물을 바치는 역할을 다 맡긴다는 조건도 없었습니다. 이미 고대 이집트의 왕같은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 3. 출애굽 이스라엘 제사에서 제물은 제물드리는 이의 고통스러운 손놀림을 통해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이웃 사이의 축제를 만들어 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소수 특권층만이 누리던 것, 그것이 제사장의 권위였고, 권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공동체는 누구나 제물바치는 이가 되어 그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만인제사장’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그 폼나던 제사장의 역할이 제사드리는 이 보조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물바치는 이를 옆에서 도우면서, 피처럼 쏟아 버릴 것 쏟아 버리고, 내장과 기름 부위 넘겨받아서 태우고 하는 역할 말입니다. 제사장과 제물 바치는 이의 역할이 뒤바뀐 것입니다.
여기에 또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레위기 1-3장은 물론 다른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물은 4가지로 구분되었습니다. 땅에 쏟아버릴 피, 내장에 덮인 기름, 붙은 기름, 콩팥, 간에 덮인 꺼풀 등의 태워 버릴 모든 기름, 화목제물의 가슴 부위와 오른쪽 뒷다리 같은 제사장에게 주어질 것, 그리고 제물바치는 이와 그 가족과 이웃이 먹을 것으로 말입니다. 이 제물은 제물드리는 이와 제사를 돕는 이(제사장), 이웃, 하나님 사이에 잔치를 제공한 것입니다.
이 부위 중 하나님의 몫은 기름을 태울 때 나오는 그 냄새였습니다. 이것을 화제, 향기로운 냄새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가운데 태워서 버릴 것을 챙기시고, 질긴 부위의 일부는 제사장에게 나머지 먹을 만한 모든 것을 제물바치는 이가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역할을 제물드리는 이가 주도하여 진행하고, 제사장은 그야말로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물은 용도별로 구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 제물드리는 이의 희생물의 가장 좋은 것을 다 누릴 수 있었다. 제물드리는 이가 구경꾼이 아니라 축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생각하기
예수를 통해 새로워진 예배는 영적 제사로 부릅니다. 영적 제사도 예배드리는 이, 예배를 돕는 이, 예물, 예배를 받으시는 분의 네 가지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현장을 보면 어떤 느낌이 다가오는지요? 누가 우리의 예배드림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 예배드리는 이는 어느 정도의 몫을 하고 있을까요? 적지 않은 경우 예배의 소비자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지요? “다 목사님이 알아서 하세요!” 하는 태도를 보이는 듯합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앞세우며 ‘만인제사장’을 말하지만, 우리들의 실제 예배드림과 예배자로서의 삶에는 구경꾼이거나 수동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다른 이의 예배드리는 삶에는 예배 도우미로, 예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의 예배를 이끄는 이가 아니라 예배를 돕는 이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예배드림에는 내가 예배드리는 이로 몫을 다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산 제물로, 예배자로, 예배를 돕는 이로 살아가는 삶, 그것도 뜻깊은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이 예배자의 모습이고, 파라오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닐까 싶습니다. 예배자, 예물, 예배 도우미의 세 가지 몫을 다하는 일상이면 좋겠습니다.
미주 크리스찬투데이
▲ 목축하는 이가 제물로 바칠 희생물을 고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예물 자체는 어떤 면에서 예물바치는 이 자신이었을 것이다.
온라인 예배, 비대면 예배 등 전혀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참된 예배자’, ‘진정한 예배’, ‘예배의 회복’, ‘삶으로서의 예배’ 등 그동안 주고받았던 대화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지만, 이런 관심사를 마주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성경이 레위기입니다. 레위기만큼 ‘예배드림’, ‘예배함’, ‘예배자’에 대하여 좋은 길잡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예배, 하나의 제사드림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무엇일까요? 제사드리는 이, 제물, 제사장, 제물 받는 이 이 네 가지인 것 같습니다. 마을에서 드리던 제사도 그렇고 집안에서 지키던 차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실패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오늘 우리의 예배함을 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제물로 바쳐진 희생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 간에 덮인 꺼풀 등은 테워야 했다. 그것을 하나님이 향기로운 제물이라며 받으셨다.
성경 속으로
레위기 1-3장의 다양한 제물드림 이야기에서도 이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제물, ‘제물드리는 이’, ‘제사장’, 이 제물 드림에서 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방송으로 촬영한다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방송 분량이 가장 많은 존재는 무엇일까요? ‘제물드리는 이’입니다. 제사장이 아닙니다.
제물은 누가 선택하나요? 제물을 성막으로 누가 데려오나요? 누가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나요? 누가 그 제물을 잡나요? 누가 그 제물을 고기 부위별로 그리고 버릴 것과 태울 것을 구별하나요? 제사장인가요? 아닙니다. 제물 바치는 이입니다. 양이나 염소, 암소나 수소를 잡을 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그 노동은 얼마나 힘든 노동이었을까요? 자신이 아끼던 양과 염소, 소 가운데 골라서 제물로 바치는 이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고대 이집트에서 그리고 전통 사회에서 제물을 바치는 이는 제주 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사장인 것이지요. 이 역할은 하나의 권위이고 권력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제사에는 왕이 제사드리는 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을 제사에서는 마을 어르신이 맡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고대 이집트에 살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제물 바치는 제사장의 권위 가득한 모습을 보았을 듯합니다. 절대권력자로 알려진 파라오 같은 존재였고, 폼나는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백성에게, 제물 바치는 이에게 절대적인 몫을 맡깁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것입니다. 제사장만이 할 수 있었던 행위를 제물바치는 이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이?“, ‘내가?’ 같은 바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물 바치는 이 훈련 과정을 이수하면, 나중에 제물을 바치는 역할을 다 맡긴다는 조건도 없었습니다. 이미 고대 이집트의 왕같은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 3. 출애굽 이스라엘 제사에서 제물은 제물드리는 이의 고통스러운 손놀림을 통해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이웃 사이의 축제를 만들어 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소수 특권층만이 누리던 것, 그것이 제사장의 권위였고, 권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공동체는 누구나 제물바치는 이가 되어 그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만인제사장’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그 폼나던 제사장의 역할이 제사드리는 이 보조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물바치는 이를 옆에서 도우면서, 피처럼 쏟아 버릴 것 쏟아 버리고, 내장과 기름 부위 넘겨받아서 태우고 하는 역할 말입니다. 제사장과 제물 바치는 이의 역할이 뒤바뀐 것입니다.
여기에 또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레위기 1-3장은 물론 다른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물은 4가지로 구분되었습니다. 땅에 쏟아버릴 피, 내장에 덮인 기름, 붙은 기름, 콩팥, 간에 덮인 꺼풀 등의 태워 버릴 모든 기름, 화목제물의 가슴 부위와 오른쪽 뒷다리 같은 제사장에게 주어질 것, 그리고 제물바치는 이와 그 가족과 이웃이 먹을 것으로 말입니다. 이 제물은 제물드리는 이와 제사를 돕는 이(제사장), 이웃, 하나님 사이에 잔치를 제공한 것입니다.
이 부위 중 하나님의 몫은 기름을 태울 때 나오는 그 냄새였습니다. 이것을 화제, 향기로운 냄새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제물 가운데 태워서 버릴 것을 챙기시고, 질긴 부위의 일부는 제사장에게 나머지 먹을 만한 모든 것을 제물바치는 이가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역할을 제물드리는 이가 주도하여 진행하고, 제사장은 그야말로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물은 용도별로 구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 제물드리는 이의 희생물의 가장 좋은 것을 다 누릴 수 있었다. 제물드리는 이가 구경꾼이 아니라 축제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생각하기
예수를 통해 새로워진 예배는 영적 제사로 부릅니다. 영적 제사도 예배드리는 이, 예배를 돕는 이, 예물, 예배를 받으시는 분의 네 가지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현장을 보면 어떤 느낌이 다가오는지요? 누가 우리의 예배드림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 예배드리는 이는 어느 정도의 몫을 하고 있을까요? 적지 않은 경우 예배의 소비자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지요? “다 목사님이 알아서 하세요!” 하는 태도를 보이는 듯합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앞세우며 ‘만인제사장’을 말하지만, 우리들의 실제 예배드림과 예배자로서의 삶에는 구경꾼이거나 수동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다른 이의 예배드리는 삶에는 예배 도우미로, 예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의 예배를 이끄는 이가 아니라 예배를 돕는 이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예배드림에는 내가 예배드리는 이로 몫을 다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산 제물로, 예배자로, 예배를 돕는 이로 살아가는 삶, 그것도 뜻깊은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이 예배자의 모습이고, 파라오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닐까 싶습니다. 예배자, 예물, 예배 도우미의 세 가지 몫을 다하는 일상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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