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에게도 철학이 필요한가...내가 내 신학을 바꿀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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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티우스(Boethius, AD 480-524)는 로마의 마지막 황제이자, 중세기의 첫 황제라고 알려졌다. 고전 세계가 무너지고 야만주의가 뿌리를 내리자 그는 가능한 한 많은 고전적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생을 마감했다...고대철학과 중세철학 사이의 중개자 중 한 명으로 인식됐으며, 그의 글 "철학의 위안"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철학적 아이디어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이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그것에 대한 주석을 작성했으며 그 논리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신학 토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또한 신플라톤주의자의 생각들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여서, 중세 시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C. S. 루이스는 자신을 "영국의 보에티우스"로 생각했다. 루이스도 과거의 위대한 전통을 버린 현대 '암흑기'의 정점에 살면서 고대 사상의 유산을 이어받고자 노력했했다. 보에티우스와 루이스를 통해 우리는 고전 철학자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것을 강조할 때가 아니라, 현대라는 이름으로 묻힌 그 오래된 사상을 부활시켜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 네 가지 때문이다.
1. 철학은 답해야 한다.
루이스는 "철학이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답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유가 없다면 좋은 철학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오늘날 우리는 형이상학적 위기(예: 명목주의, 자연주의, 유물론), 인류학적 위기(예: 태아의 인격성 부정, LGBT+ 운동), 인식론적 위기(예: 상대주의, 음모론, 가짜 뉴스), 윤리적 위기(예: 낙태, 안락사, 사춘기 차단제, 총격 사건), 정치적 위기(예: 극단의 이데올로기와 전체주의 등 각종 뉴스를 보라), 그리고 현재 재앙의 잘못된 뿌리인 논리적 위기다. 나쁜 철학은 어느 한 모퉁이에 숨어 있지 않다. 광장에서 다양한 뉴스를 전하고 있으며, 트위터나 틱톡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마음 속 외침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고대 및 중세 철학자들은 초월적인 진리, 선,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모든 주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초월적인 것은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너의 진리"와 "나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너에게 좋은 것"과 "나에게 좋은 것"도 없었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리, 선함, 아름다움은 인간의 감정과 경험의 변덕에 구애받지 않는 초월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 이교도들도 이렇게 믿었기 때문에 루이스는 "우리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전에 예비적으로 사람들을 실제 이교로 다시 개종 필요가 없는지" 궁금해했다. 기독교 철학자들은 이교도 철학자들이 찾던 객관적인 이상 즉 그들도 신은 변함없이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초월적인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철학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답해야 하며, 좋은 철학이라야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다.
2. 인생 자체에 대해 답을 주어야 한다.
철학의 목적은 인생에서 가장 피할 수 없는 질문(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번영에 관한 가장 실용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철학의 각 분과에서 제기하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 논리학: 인생의 첫 번째 원칙(기본 진리)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추론할 수 있는가?
- 형이상학: 우주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 인류학: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나?
- 인식론: 우리는 어떻게 사물을 알 수 있나?
- 윤리학: 도덕의 기초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도덕을 따라야 할까?
- 정치학: 사회와 제도를 어떻게 하면 인간의 번영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기독교 이후 세상의 대답은 충분하지 않다. 심리학자들은 Z세대를 역대 가장 '우울하고 불안하며 연약한 세대'라고 부른다. 소셜 미디어, 코로나19, 기타 수많은 요인이 작용했을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게 나쁜 철학을 주입하고,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문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비추어야만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3. 철학은 신학을 위한 것이다.
중세시대까지 사람들은 "신학은 과학의 여왕이고 철학은 그 시녀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사이에는 완벽한 조화가 있다"는 말을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요한은 그리스어 개념인 로고스("말씀")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영원한 존재를 설명했고(요 1:1), 바울은 이교도 철학을 전도의 근거로 보았으며("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0), 베드로는 헬레니즘의 덕 윤리를 기독교 가르침에 사용했다("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 1:5-6).
교회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인들은 신학적 구분을 하기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개념을 사용했다. 이것은 소규모가 아니라 니케아 정교회와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학 전통 안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 기독교 사상가들은 아무 자격 없이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전의 철학적 공식을 수정하고 수정했다.
헤르만 바빙크가 설명했듯이, “신학에는 특정 철학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철학은 무분별한 자신의 생각과 기준이 아니라 논리적인 생각들 위에 세워진 사상체계이다. 그러므로 모든 철학을 테스트하고, 진실되고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필요한 것은 로마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것을 섬기게 하는 잘못된 철학이 아니라 이치를 따쳐서 참과 진리를 구별할 줄 알게 하는 철학이다.”
4. 기독교는 좋은 철학이다.
기독교는 철학 그 이상이지만 그 이하도 결코 아니다. 우리가 이어받은 고대 '기독교 철학'은 나쁜 철학에 대한 해답이다. 조나단 페닝턴이 주장하듯이, 성경은 대중의 믿음과는 달리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고대 철학책(오해 없길 바란다. 일종의 사상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며 교회 역사를 통틀어 많은 기독교인, 특히 저스틴 마티어와 같은 초대 교부들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지혜에 대한 그의 사랑과 모순되지 않았다. 지혜는 그 기초였다. 저스틴은 그의 글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에서 "나는 기독교 철학만으로도 안전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철학자다"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언제나 진정한 철학이었다. 그것을 알아야만 현대의 암흑 속에 빛을 가져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