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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팔라우 목사는 어떤 전도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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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KCMUSA| 작성일2021-03-11 | 조회조회수 : 2,99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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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인이며 현재 로마가톨릭 교황 호르헤 베르고글리오와 오랜 친구


    그의 도시 전도집회의 일차적 목표는 "사람들을 직접 회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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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3월 11일)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소천한 팔라우는 중남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역사적인 순간에 복음을 전했다. 오순절주의는 1900년대 초에 처음으로 이 지역에 당도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에콰도르의 르네 파디야와 페루의 사무엘 에스코바는 통전적 선교(총체적 선교)에 대한 논쟁을 벌였고, 그들은 더 큰 사회적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개인의 구원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를 비판했다. 


    팔라우는 이 궤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가 스페인어로 쓴 글들은 해방신학을 비판했고, 그의 사역은 회심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노년에 그는 고향인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지역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노트르담 대학의 대런 도추크 역사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팔라우는 접근 용이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고 개인의 구원을 목표로 영적 우선순위를 정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식도 갖고 있었다. 총체적인 사회적 복음은 아니었지만 사회적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 팔라우의 국제 사역은 의도적으로 미국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의 사역에서 적극적인 리더십 역할을 맡은 아들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전도집회는 록 콘서트와 지역사회 봉사 프로젝트를 점점 더 과감하게 도입했다. 1999년 뉴욕 타임스는 그레이엄을 계승할 인물인 누가 될지 조사했다. 팔라우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성년 시절을 미국에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팔라우는 라디오를 통해, 십대 시절 그가 처음으로 그레이엄의 설교를 듣고 복음전도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게 해준 바로 그 라디오를 통해 꾸준히 중남미에 복음을 전했다. 그는 여러 차례 황금 시간대를 구매해서 전도집회 TV 방송을 했다. 그는 공개적인 설교 외에도 지역 TV 방송에도 출연해 시청자 질문을 받고 현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팔라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 인제니에로 마슈비츠(Ingeniero Maschwitz)에서 자랐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후 스페인에서 이민 온 아버지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피를 물려받은 어머니에게서 1934년에 일곱 자녀 중 유일한 남자아이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2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팔라우의 부모인 루이스 팔라우 시니어와 마틸드 밸푸어드 팔라우는 “에드워드 로저스”라는 영국 석유회사의 고위 임원이 팔라우의 어머니에게 성경을 준 계기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로저스는 어린 시절 팔라우에게 중요한 영적 영향력을 끼쳤으며, 팔라우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재정적으로 가족을 도와주기도 했다.


    팔라우의 개인적 회심은 1947년 여름 캠프에서 당시 캠프 상담자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팔라우는 훗날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했는지 입을 떡 벌어지는 이야기가 없어도 된다. 그것이 당신의 것임이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죄인 중 괴수’의 신분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품으로 이끄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죄가 무엇인지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은데,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 때로는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흔들리는 손전등에서 나온 광선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의 회심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다.”


    팔라우는 2개 국어를 구사하는 부모님을 통해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는 영국 기숙학교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연계된 명문 학원에서 대부분 영어로 교육을 받았다.


    학업을 마치고 아르헨티나에서 런던은행 지점에 취직한 팔라우는 10대 시절 라디오를 통해 그레이엄의 목소리를 처음 접했다. 몇 년 후에 팔라우는 지역 라디오에서 설교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변호사가 되기 원했던 팔라우는 후에 그레이엄의 전도집회와 같은 세계적 규모의 대중 전도자로서 사역을 꿈꾸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팔라우는 미국에서 초빙된 목사이자 작가인 레이 스테드먼이 이끄는 성경 공부에 참석했는데, 그는 팔라우에게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목회 훈련을 받으라고 몇 달간 촉구했다.


    팔라우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으로 가서 젊은 척 스윈돌의 멘토링을 겸하고 있던 스테드먼과 함께 살았다. 스테드먼의 멘토십은 단순히 책을 추천하거나 조언을 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는 성도들을 상담할 때 팔라우를 데리고 다니며, 솔직하고 금기시되는 이야기로 팔라우를 놀라게 했다. 스테드만은 팔라우의 원론적인 성격을 놀리듯 지적하며 댈러스 신학교 진학을 독려했지만, 결국 팔라우는 4년제 대신 멀트노마성경학교(현 멀트노마 대학교)의 1년짜리 과정을 선택했다.


    멀트노마에서 팔라우는 세계적인 전도자를 꿈꾸던 오리건주 출신인 아내 페트리샤를 만났다. 결혼 후 부부는 디트로이트로 이사한 뒤 해외 복음전도기관에서 사역하며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멕시코 등지에서 살았다. 그들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팔라우 부부는 아이들을 오리건에서 키우기로 결정했다. 팻이 집에 머물며 아이들을 양육하는 동안 팔라우는 계속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는 결혼한 후 57년 동안 누적된 시간을 더해 보니 15년간은 가족과 떨어져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팔라우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아들들의 삶에서 보물과 같은 소중한 많은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지만 저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함께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한 점은 아쉽다.”


    팔라우와 그레이엄은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잠시 만났지만, 팔라우가 서른 살 무렵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팔라우는 그레이엄을 존경하여 도시를 중심으로 전도하는 전략을 모방했고, 성공한 사업가들을 그의 사역 이사회에 영입하고, 사회적 화두가 되는 내용을 설교에서 언급하며 유명해졌다. 


    저명한 운동선수들을 그의 전도집회에 초대하여 간증하게 했고,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그를 초청하지 않으면 전도집회를 하지 않으려 했다. 사역 초기에는 그레이엄과 함께 다니며 말씀을 통역하기도 했고, 수십 년간의 긴 사역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그레이엄과 동역 관계로 사역했다.


    팔라우의 전도집회는 수십 년간 지역 교회와 성서 공회들과 협업했는데 그중 많은 이들이 오순절파였다. 팔라우와 그의 사역팀은 수많은 군중에게 말씀을 전할 뿐만 아니라 지역 지도자들과의 만남도 모색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1974년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과테말라의 카를로스 아라나 오소리오 대통령과 12분간 예정되었던 회담이 무려 1시간 동안 이어졌다. 대통령은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하며 팔라우가 준 성경을 받았다.”


    아마도 팔라우의 가장 악명 높은 친구는 훗날 집단학살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판결은 후에 뒤집혔다) 과테말라인 리오스 몬트였을 것이다(그는 여러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친구라고 여겼다). 1983년 크리스천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팔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 대통령을 본보기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에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국제적인 사역과 20세기 후반 중남미가 겪은 정치적 격변의 시기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팔라우는 정치적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1996년에 팔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판에 들어가라는 소명을 받은 자들은 그것을 주님의 사역으로 여겨야 한다. 좌파든 우파든 무신론자든 종교 지도자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항상 정치인들에게 ‘당신의 직책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고, 당신은 하나님의 목사’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정의와 옳은 일을 생각하고, 가난하고 도움이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격려한다. 그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팔라우는 정치 지도자들과의 인맥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르헨티나인이며 현재 로마가톨릭 교황 호르헤 베르고글리오와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 친구가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됐을 때 팔라우는 크게 환영했다.


    2013년 크리스천 투데이 인터뷰에서 팔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인이며 좋은 성품을 가진 분일 뿐만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개방적인 분이라 기대된다. 단순히 그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좋은 감정이 생겼다.”


    이러한 에큐메니컬 파트너십 정신은 팔라우의 전도집회에서도 나타났는데, 이는 긴 시간 동안 지역 교회와의 현장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소외된 그리스도인들의 신뢰 구축했다. 이러한 협력은 기독교를 넘어 다른 종교까지 확장되었다. 특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과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대립해온 이집트와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그의 전도집회가 그런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중남미에서는 가톨릭 신자 등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팔라우가 개최한 행사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동지애가 모든 지역에 확대된 것은 아니었다. 1976년 오순절파와 비오순절파 그리스도인의 분열로 인해 히스패닉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준비했던 시카고 전도집회가 취소되었다.


    1996년 크리스천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팔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흥미롭게도, 미국은 교단들이 함께 일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나라이다. 미국은 ‘하나님 아래 하나의 국가’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론에 불과하다. 도시 전도집회의 일차적 목표는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을 직접 회심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지역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여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가 아르헨티나에 많은 영적 유산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미를 떠난 시기에 팔라우의 신학훈련과 관계, 사역구조에서 전 세계가 그를 미국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레어몬트대학원 종교학과 부교수인 다니엘 라미레즈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 모델을 채택했다. 그의 사역은 책임감, 경영 전문성, 기금 모금, 정당성을 충족시키는 훌륭한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이런 방식은 중남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온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팔라우의 미국인으로서의 존재감이 더 강해졌고, 이전의 여러 국제적 사역들과는 차별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들이 팔라우에게 크루세이드(전도집회) 대신 페스티벌(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자고 설득했는데, 이 제안 때문에 처음으로 다투게 되었다고 했다. 대세에 발맞추어 경기장 대신 도심 공원에서 모이기 시작했으며, 지역봉사 프로젝트들을 함께 하며 집회를 진행했다. 또한 대학생들의 봄방학 기간에 맞추어 위성을 통해 수십 개 교회에 방송하며 음악 밴드와 유명 연사, 지역 스포츠와 함께 하는 해변 파티를 통해 대학생들을 상대로 사역하기도 했다.


    휘튼칼리지 빌리그레이엄센터의 에드 스텟처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분명 정통파였지만 위화감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도 미전국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해냈다.”


    몇 년 뒤 포틀랜드 지역에서 동성애자라고 공적으로 선언했던 당시 시장과도 관계를 이어가며 사역하고, 세속적이고 진보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도시와 협업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때로 팔라우는 지역사회 봉사를 하며 집중되는 사역으로 인해 자칫 자신이 부르심을 느꼈던 복음전도를 가리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다고 말했다.


    2008년 크리스천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진보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정치인들과 점심을 먹고 있다고 해서 복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를 설교하기 위해 계속해서 헌신할 것이다.”


    팔라우는 미국에서 개최하는 축제를 통해서도 중남미 공동체와의 관계를 쌓으려고 노력했다.


    팔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라틴계 사람들은 가족에게 헌신하며, 히스패닉은 복음이 버려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나라에 복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최선의 위치에 있다. 나는 단지 성경구절을 언급했을 뿐인데 그들은 박수를 쳤다.” 일리노이 대학교-시카고 파빌리온 집회에서 팔라우가 성경의 첫 구절을 읽었는데 청중은 나머지 부분 뒤로 따라 말하며 함성을 쏟아냈다.


    또한, 팔라우는 라틴계가 양극화된 백인과 흑인 공동체를 연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백인들처럼 도시에서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으며, 우리는 흑인 사회와 같은 역사적 상처를 가지고 있지 않다.”


    팔라우는 “라틴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급증하면 복음주의 교회 자체도 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류 복음주의 교회는 이 문화 속에서 너무 안일해졌다. 열정을 잃었고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


    팔라우가 방문했던 많은 나라의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부분의 정치 공격을 피했다. 1977년 팔라우는 한 달 동안 웨일스에 머물며 60,000명이 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2005년, 카디프시는 팔라우의 “극단적인 복음주의적 신념”을 이유로 행사를 취소했다. 그해 팔라우는 중국 가정교회들이 “정부로부터 더 큰 자유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를 공식적으로 등록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발언은 종교적 자유 옹호자들로부터 날카로운 반발을 샀다.


    미국에서 사역이 확대되는 와중에도 팔라우는 서구에서 복음주의 열정이 식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1998년 크리스천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복음전도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지만, 반면 진정한 복음전도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북미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콘서트에 가기 위해 큰 금액을 기꺼이 지불한다. 그 사람들이 예배하기 위해 회관으로 모이고 심지어 종교 간의 영적 논쟁 컨벤션을 하기 위해서도 모인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복음이 필요하다고 직접적으로 전하는 대면 모임에서는 갑자기 숫자가 줄어든다. 도시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에 대한 많은 교회의 반응은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와 ‘돈이 많이 든다’는 반응이었다.”


    15년이 지난 후 팔라우는 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팔라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특히 앵글로 색슨계는)은 대화를 해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성령께서는 세상의 죄를 정의로 심판하겠다고 하셨다. 당신은 그것을 믿는가? 나는 그것을 믿는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루이스 팔라우가 오늘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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