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제목: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왜? (욥기 31: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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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Part B. (욥 31:13-23)
제목: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왜?
어느 날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서 성경의 핵심적 교훈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유일한 계명으로 주셨는가? 하나님은 “왜” 사람을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까지 하셨는가?
이는 곳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답에 도달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과 바울의 권면은 거의 모두 사람이 사람을 귀중히 여길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 측면에서 보면, 구약에 기록된 인물들 중 욥이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깊이 이해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1.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고 산 욥 (욥 31: 13-20)
a. 욥은 “남종과 여종”을 존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1:13). “남종과 여종”이 욥에게 “불만(쟁변/grievances)”을 표출한 경우 그들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맹세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욥을 고소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욥을 심문하실 경우를 대비하여 흠잡힐 일이 없도록 관계를 관리했다는 주장입니다. (법정, 즉 심판대를 배경으로 한 말)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31:13-14)
당시 “종(slave)”은 주인이 소유한 재산(legal property)에 지나지 않았으며, 주인의 편의와 부를 축적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tool)’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종’은 그저 이용 및 기능 차원에서 ‘가치’가 결정지어졌습니다. (I-it 관계) (참조: 눅 17:7-10)
때문에, 하늘을 찌르듯한 부와 권세를 가졌던 욥은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이 표출하는 “불만(쟁변)”을 “멸시”할 수 있었으나, 욥은 ‘종(낮은 자)’의 불만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들을 변호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고, 하나님이 주재하시는 최후 심판(고후 5:10; 계 20:11-15)의 최종 판결은 사회적 신분과 무관하게 공평과 정의에 근거해서 결정이 날 것을 알고 처신했습니다. (엡 6:8-9; 롬 2:11; 행 10:34; 마 18:10
b. 31:15절은 욥이 ‘종’을 존중한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합니다.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나를 뱃속에서 지으신 자가 그들도 짓지 아니하셨느냐?” (참조: 시 139:13; 갈 1:15)
세상은 말하기를, 인간은 우연히 먼지로부터 와서 자연스러운—즉 목적 없는—진화 과정을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고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엄성이 부재한 존재라고 주장하며 약한 자는 힘이 센자에게 잡혀 먹히는 냉혹한 자연 법칙이 우주를 지배하듯, 사람도 금수(禽獸)를 모델삼아 경쟁하고, 겨루고, 경쟁자를 제거하는 투철한 자세로 살아 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토마스 홉스 (1651)와 찰스 다윈 (1859)이 말한 “All against all”적인 관계)
그러나 15절에서 욥은 인간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시인합니다. 이 존엄성은 그 누구도 앗아가거나 짓밟을 수 없는 성격의 존엄성입니다. (Thomas Jefferson, “unalienable Rights/떼어낼 수 없는 권리”) 이는 ‘창조의 원칙’에 근거한 ‘영적 인간론’입니다.
때문에 욥은 남편-아내, 부모-자녀, 사장-직원, 판매원-고객 같은 사람과 사람 간의 사회적 관계가 성립되기 이전에 신성한 ‘하나님-사람’의 관계가 선천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참조: 마 18:20)
이 영적 원칙을 인식한 두 사람은 역지사지한 마음을 품습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개인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남(이웃)의 유익(도)을 (함께)구하고 (고전 10:24), 상대의 관심과 필요를 이해하려(빌 2:4)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뜻이 합하는 한 마음(빌 2:2)”을 품는 일심동체에 이르러 “한 인류(한 몸)”가 됩니다. (창 1:26-27; 2:24; 마 19:5-6) 둘 사이에 단절된 괴리를 의미하는 “너”와 “나”라는 관계가 아닌 “우리”라는 관점에서 시작함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마 7:12; 막 7:31)”하는 그리스도의 법칙(갈 6:2; 고전 9:21)이 관계의 원칙이 됩니다.
이런 가치관/세게관을 가진 사람은 알면서, 또는 의도를 가지고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약속, 계약, 책임 등을 준수합니다. 상대의 인격과 의견을 존중합니다. 상대의 권리(인권), 자유, 취미(취향), 꿈, 표현의 자유 등을 존중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이 영적 원칙을 적용하여 하나님 중심에서 그와 종과의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의 개입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참조: 마 18:20)
c. 욥이 가졌던 좌우명은 그의 생활 터전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31:16-20)
‘창조 세계관(creation theology)’으로 다듬어진 욥의 인간성을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본인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문자주의에 입각하여 주장하는 ‘창조 과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계급-신분을 떠나 모든 사람은 목숨을 연명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를 누릴 자격을 갖춘 인격체로 보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고통 속에 있는 경우, 욥은 그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자세를 갖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따뜻한(긍휼)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욥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요시아)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2:16)”,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 28:28)”
d. 욥은 인간을 존중하는 원칙을 그를 미워하는 자, 즉 ‘원수’에게까지 적용하는 성숙함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29절: 참조-마태 5:43-48)”. 그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재앙”을 만난 경우 이를 반갑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원수까지 사랑”한 “하나님의 아들(마 5:45)”이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온전한 의인이었습니다. (마 5:48)
2. 성경(구약과 신약)에 근거한 인간론과 인간관계 원칙
창세기에 기록된 사람의 창조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서 세 가지 원칙을 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에 사용된 “형상(tselem/image, likeness)”은 ‘복제’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를 근거로 사람은 하나님과 다를 바 없는 인격체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Richard von Rad, Genesis: A Commentary, 1972; p. 97), 시편 기자는 “그(사람)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고 밝힘으로써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확인해 주고 있지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둘째로, 한글이 “사람”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אָדָם(adam/아담)은 “인류”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보통 영어로는 "man", "humanity", 또는 "humankind”로 번역합니다 (창 1:26). 그 사람(아담/인류)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 /(אָדָם)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창 2:18)”고 진단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은 ‘공동체/집단’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된 생명체입니다. 뱀의 역할/목적(창 3:14-19)은 ‘하나님과 인류’, 그리고 ‘사람과 하와’의 관계를 파괴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공동체/집단”적 환경이 요구하는 행동규범(예의, 배려 등)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부와 권세를 가진 몇몇 사람들이 직원들을 멸시하는 태도로 대하는 녹취 파일이 공개되면서 뉴스를 장식했습니다. 그중에는 목사도 있었고, 정치인도 있었습니다. 미국도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불법 이민자’, ‘유색인종’, ‘가난한 자’라는 사회적 이름표를 붙이고 사람을 짐승을 다루듯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중동 지역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모든 이방인들을 “개”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빌 3:2) 자기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음식을 가려 먹는데—고로 거룩한데--이방인들은 길거리를 배회하며 분별없이 아무 음식(예를 들면, 돼지 고기. 새우 등)이나 먹는 들짐승과 같다는 취지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이런 금지된 음식을 먹음으로써 ‘거룩’에 반대되는 더러운(profane) 사람이 된다고 믿었음.) 예수님은 저들의 이런 발상을 막 7:1-22에서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아울러 저들은 비유대인을 (Gentile: a non-Jewish person) “goy (גוי)”로 명명하는데 우월심을 가진 자(집단)가 다른 사람(집단)을 열등하게 보는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파괴된 인간관계가 불러온 끔찍스러운 현상입니다. 참으로 잔인합니다. 참으로 무자비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 (subhuman)로 취급하는 뉴스를 보면서, 성경의 가르침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병든 세상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9; 참조: 눅 12:58-59) “화목하게 하는 사명/사역”을 교회에 부여 했다는 번역이 더 정확한 번역인데, “화목”이라는 말은 부서진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세상은 사람을 ‘이용-기능’ 차원에서만 보며, 필요 없으면 처분해 버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모래처럼 흩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도생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왜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가?(렘 8:22)”라며 고통받던 백성과 함께 “슬퍼하시고 근심(렘 8:18)”하신 하나님의 신음을 듣고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응답하고 인간관계의 파괴로 병들어 가는 가정, 직장, 교회, 사회를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 이제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육체대로”라 함은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적 가치관 및 사회적 시각 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복된 인류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골 3:11; 갈 3:26-29)”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눈에는 귀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로 사람을 대했다고 고백합니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그런 그는 사람이 모인 집단(“인류)”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라고 정의 내리고 누군가가 이 귀한 ‘성전’을 더럽히면(무너뜨리면) 하나님이 그를 “멸하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존엄성과 집단의 존엄성(규범)을 함께 존중해야 합니다. 이토록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예수님의 교훈을 대언했던 바울은 그의 주옥같은 글에서 (귀한)사람이 (귀한)사람을 대할 때 갖추어야 할 자세와 지켜야 할 규범을 수차례 나열했습니다. (예, 고전 10:24, 33; 13:4-7)
욥은 이 모든 영적 원칙(규범)을 삶의 터전에서 보여 준 의인입니다. 하나님은 버린 채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깊이 살펴보아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으나 이해할 수 없었던 시편 기자는 의아해하며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 하나님에게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박 창형 목사
2026년 8월 8일
제목: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왜?
어느 날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서 성경의 핵심적 교훈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유일한 계명으로 주셨는가? 하나님은 “왜” 사람을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까지 하셨는가?
이는 곳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답에 도달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과 바울의 권면은 거의 모두 사람이 사람을 귀중히 여길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 측면에서 보면, 구약에 기록된 인물들 중 욥이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깊이 이해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1.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고 산 욥 (욥 31: 13-20)
a. 욥은 “남종과 여종”을 존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1:13). “남종과 여종”이 욥에게 “불만(쟁변/grievances)”을 표출한 경우 그들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맹세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욥을 고소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욥을 심문하실 경우를 대비하여 흠잡힐 일이 없도록 관계를 관리했다는 주장입니다. (법정, 즉 심판대를 배경으로 한 말)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31:13-14)
당시 “종(slave)”은 주인이 소유한 재산(legal property)에 지나지 않았으며, 주인의 편의와 부를 축적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tool)’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종’은 그저 이용 및 기능 차원에서 ‘가치’가 결정지어졌습니다. (I-it 관계) (참조: 눅 17:7-10)
때문에, 하늘을 찌르듯한 부와 권세를 가졌던 욥은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이 표출하는 “불만(쟁변)”을 “멸시”할 수 있었으나, 욥은 ‘종(낮은 자)’의 불만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들을 변호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고, 하나님이 주재하시는 최후 심판(고후 5:10; 계 20:11-15)의 최종 판결은 사회적 신분과 무관하게 공평과 정의에 근거해서 결정이 날 것을 알고 처신했습니다. (엡 6:8-9; 롬 2:11; 행 10:34; 마 18:10
b. 31:15절은 욥이 ‘종’을 존중한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합니다.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나를 뱃속에서 지으신 자가 그들도 짓지 아니하셨느냐?” (참조: 시 139:13; 갈 1:15)
세상은 말하기를, 인간은 우연히 먼지로부터 와서 자연스러운—즉 목적 없는—진화 과정을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고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엄성이 부재한 존재라고 주장하며 약한 자는 힘이 센자에게 잡혀 먹히는 냉혹한 자연 법칙이 우주를 지배하듯, 사람도 금수(禽獸)를 모델삼아 경쟁하고, 겨루고, 경쟁자를 제거하는 투철한 자세로 살아 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토마스 홉스 (1651)와 찰스 다윈 (1859)이 말한 “All against all”적인 관계)
그러나 15절에서 욥은 인간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시인합니다. 이 존엄성은 그 누구도 앗아가거나 짓밟을 수 없는 성격의 존엄성입니다. (Thomas Jefferson, “unalienable Rights/떼어낼 수 없는 권리”) 이는 ‘창조의 원칙’에 근거한 ‘영적 인간론’입니다.
때문에 욥은 남편-아내, 부모-자녀, 사장-직원, 판매원-고객 같은 사람과 사람 간의 사회적 관계가 성립되기 이전에 신성한 ‘하나님-사람’의 관계가 선천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참조: 마 18:20)
이 영적 원칙을 인식한 두 사람은 역지사지한 마음을 품습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개인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남(이웃)의 유익(도)을 (함께)구하고 (고전 10:24), 상대의 관심과 필요를 이해하려(빌 2:4)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뜻이 합하는 한 마음(빌 2:2)”을 품는 일심동체에 이르러 “한 인류(한 몸)”가 됩니다. (창 1:26-27; 2:24; 마 19:5-6) 둘 사이에 단절된 괴리를 의미하는 “너”와 “나”라는 관계가 아닌 “우리”라는 관점에서 시작함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마 7:12; 막 7:31)”하는 그리스도의 법칙(갈 6:2; 고전 9:21)이 관계의 원칙이 됩니다.
이런 가치관/세게관을 가진 사람은 알면서, 또는 의도를 가지고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약속, 계약, 책임 등을 준수합니다. 상대의 인격과 의견을 존중합니다. 상대의 권리(인권), 자유, 취미(취향), 꿈, 표현의 자유 등을 존중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이 영적 원칙을 적용하여 하나님 중심에서 그와 종과의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의 개입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참조: 마 18:20)
c. 욥이 가졌던 좌우명은 그의 생활 터전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31:16-20)
‘창조 세계관(creation theology)’으로 다듬어진 욥의 인간성을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본인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문자주의에 입각하여 주장하는 ‘창조 과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계급-신분을 떠나 모든 사람은 목숨을 연명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를 누릴 자격을 갖춘 인격체로 보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고통 속에 있는 경우, 욥은 그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자세를 갖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따뜻한(긍휼)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욥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요시아)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2:16)”,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욥 28:28)”
d. 욥은 인간을 존중하는 원칙을 그를 미워하는 자, 즉 ‘원수’에게까지 적용하는 성숙함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29절: 참조-마태 5:43-48)”. 그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재앙”을 만난 경우 이를 반갑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원수까지 사랑”한 “하나님의 아들(마 5:45)”이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온전한 의인이었습니다. (마 5:48)
2. 성경(구약과 신약)에 근거한 인간론과 인간관계 원칙
창세기에 기록된 사람의 창조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서 세 가지 원칙을 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에 사용된 “형상(tselem/image, likeness)”은 ‘복제’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를 근거로 사람은 하나님과 다를 바 없는 인격체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Richard von Rad, Genesis: A Commentary, 1972; p. 97), 시편 기자는 “그(사람)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고 밝힘으로써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확인해 주고 있지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둘째로, 한글이 “사람”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אָדָם(adam/아담)은 “인류”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보통 영어로는 "man", "humanity", 또는 "humankind”로 번역합니다 (창 1:26). 그 사람(아담/인류)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 /(אָדָם)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창 2:18)”고 진단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은 ‘공동체/집단’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된 생명체입니다. 뱀의 역할/목적(창 3:14-19)은 ‘하나님과 인류’, 그리고 ‘사람과 하와’의 관계를 파괴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공동체/집단”적 환경이 요구하는 행동규범(예의, 배려 등)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부와 권세를 가진 몇몇 사람들이 직원들을 멸시하는 태도로 대하는 녹취 파일이 공개되면서 뉴스를 장식했습니다. 그중에는 목사도 있었고, 정치인도 있었습니다. 미국도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불법 이민자’, ‘유색인종’, ‘가난한 자’라는 사회적 이름표를 붙이고 사람을 짐승을 다루듯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중동 지역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모든 이방인들을 “개”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빌 3:2) 자기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음식을 가려 먹는데—고로 거룩한데--이방인들은 길거리를 배회하며 분별없이 아무 음식(예를 들면, 돼지 고기. 새우 등)이나 먹는 들짐승과 같다는 취지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이런 금지된 음식을 먹음으로써 ‘거룩’에 반대되는 더러운(profane) 사람이 된다고 믿었음.) 예수님은 저들의 이런 발상을 막 7:1-22에서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아울러 저들은 비유대인을 (Gentile: a non-Jewish person) “goy (גוי)”로 명명하는데 우월심을 가진 자(집단)가 다른 사람(집단)을 열등하게 보는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파괴된 인간관계가 불러온 끔찍스러운 현상입니다. 참으로 잔인합니다. 참으로 무자비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 (subhuman)로 취급하는 뉴스를 보면서, 성경의 가르침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병든 세상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9; 참조: 눅 12:58-59) “화목하게 하는 사명/사역”을 교회에 부여 했다는 번역이 더 정확한 번역인데, “화목”이라는 말은 부서진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세상은 사람을 ‘이용-기능’ 차원에서만 보며, 필요 없으면 처분해 버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모래처럼 흩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도생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왜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가?(렘 8:22)”라며 고통받던 백성과 함께 “슬퍼하시고 근심(렘 8:18)”하신 하나님의 신음을 듣고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응답하고 인간관계의 파괴로 병들어 가는 가정, 직장, 교회, 사회를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 이제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육체대로”라 함은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적 가치관 및 사회적 시각 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복된 인류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골 3:11; 갈 3:26-29)”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눈에는 귀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로 사람을 대했다고 고백합니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그런 그는 사람이 모인 집단(“인류)”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라고 정의 내리고 누군가가 이 귀한 ‘성전’을 더럽히면(무너뜨리면) 하나님이 그를 “멸하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존엄성과 집단의 존엄성(규범)을 함께 존중해야 합니다. 이토록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예수님의 교훈을 대언했던 바울은 그의 주옥같은 글에서 (귀한)사람이 (귀한)사람을 대할 때 갖추어야 할 자세와 지켜야 할 규범을 수차례 나열했습니다. (예, 고전 10:24, 33; 13:4-7)
욥은 이 모든 영적 원칙(규범)을 삶의 터전에서 보여 준 의인입니다. 하나님은 버린 채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깊이 살펴보아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으나 이해할 수 없었던 시편 기자는 의아해하며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 하나님에게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박 창형 목사
2026년 8월 8일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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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욥기 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왜.pdf (453.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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