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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조명환의 추억여행(36)] 고린도(Cori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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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크리스천위클리| 작성일2024-06-24 | 조회조회수 : 2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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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고린도의 유적들 가운데 아폴론 신전의 남아있는 기둥 7개가 왼쪽으로 보이고 고린도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크로 코린스 산이 멀리 보인다. 아크로 코린스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고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가 돌을 끌어올려 형벌을 받은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헬라어로 ‘고린도식 생활’이라 함은 화려함과 방종함을 의미했고 ‘고린도인 처럼 산다’란 음란한 삶을 산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고린도란 이렇게 음란과 방종을 뜻하는 말로 통했으니 이 도시가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고 부패한 도시였는지를 짐직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 전서 하면 당장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 ”로 시작되는 고린도 전서가 떠오른다.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도 기억하는 말이다. ‘사랑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장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고린도서에서 춘추에 길이 기억될 ‘사랑의 명언’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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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때 세운 교회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다(행18:1-8).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결혼문제, 우상제물문제, 신령한 은사문제를 놓고 바울에게 질문을 해 왔고(고전7-14장), 이에 대해 보낸 첫 번째 바울서신은 분실되었고 두 번째 보낸 서신이 바로 고린도 전서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에서 AD 54~ 55년 경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AD 55년 마게도냐에서 디도가 가져온 소식을 듣고 답장으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를 떠나 AD 56년 가을부터 57년 사이에 고린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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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린도의 아고라에서의 필자. 뒤에 보이는 산이 아크로 코린스 산이다


고린도서가 씌여 질 때 고린도의 배경은 어땠을까?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반도가 만나는 두 바다 사이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 동쪽 해협 입구에는 겐그리아, 서북쪽으로는 살로미카만의 레헤움(Lechaeum) 항구가 있다. 이처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 때문에 고린도는 고대사에서 잦은 전쟁터로도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광채’라고 알려질 만큼 상업과 행정의 중심도시였다


그러나보니 잡다한 인종과 민족의 집합 장소인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였고 약 20만명의 자유민에 대해 40만명 이상의 노예가 고린도 인구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바울이 처음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인구는 6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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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박물관 야외에 있는 목이 없는 조각상


상업도시였던 고린도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발달하고 향락의 도시로 유명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수많은 매춘부가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이 때문에 고린도에 모였다. 매춘이 성행했지만 이를 종교적인 행위로 보았다.


사도바울은 1년 반이나 고린도에 머물며 전도했는데 에베소에서 약 3년 정도 목회했던 때를 제외하면 전도 여정 중 가장 오래 머문 도시였다. 그리고 바울 생애에 잊을 수 없는 ‘믿음의 부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이들은 유대인이기는 했지만 좀 독특한 영적 배경과 사명을 지닌 부부로서 부인이 뛰어난 영성을 가졌는지 그 이름이 늘 앞에 나와 있다.


우리에겐 고린도 전후서 때문에 고린도는 너무 귀에 익숙한 도시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고린도에 바울과 초대교회에 관련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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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위 사진은 고린도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당이다. 희랍정교회 소속이다. 가운데 사진은 교회당 안에 있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성화. 제일 아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새겨놓은 석판이다


바울 기념 희랍 정교회당


고린도는 로마유적이 남아 있는 구 고린도와 새롭게 발전된 신 고린도로 나뉘게 되는데 신고린도에는 사도 바울 기념교회가 서 있다. 교회 왼쪽은 베드로 사도, 오른쪽은 바울 사도의 모자이크가 있고 교회 입구 우측면에는 대리석 판에 고린도전서 13장의 1~8절까지의 말씀이 헬라어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리석 판에는 이 교회 역대 목회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맨 위엔 1대 목회자 사도 바울, 2대는 아볼로, 3대는 실라, 4대는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행18장에서 바울을 고발했지만 후에 개종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교회당 안에는 동방정교회 대부분의 예배당과 같이 예수님의 일생에 관한 성화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구약의 선지자들과 바울과 베드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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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박물관에 있는 네로 황제의 얼굴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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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운하 위에서의 필자.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된 항구도시였다 


고린도 운하


고린도에 가면 고린도의 명물인 고린도 운하를 찾아간다. 이 운하는 알렉산더 대왕이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로마 황제 네로도 유대의 반란포로 6000명을 동원해서 공사를 시작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근대에 이르러 프랑스에 의해 1881-1893 사이 공사를 통해 결국 운하가 완성되었다. 이 운하가 때문에 이오니아 바다와 에게 해의 거리가 700 Km나 단축됨으로 무역과 경제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아폴론 신전


고린도의 황금기인 BC 6세기경 태양신 아폴론(아폴로)을 모시기 위해 건설된 신전으로 38개의 기둥이 감싸는 거대한 신전이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기둥은 7개 정도가 남아있다. 아폴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중 하나로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며 아르케미스와는 쌍둥이다. 이 신전의 기둥들은 도리아 식 기둥으로 간결하고 장중한 남성미가 풍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린도 박물관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이곳에서 발굴, 발견된 것과 이 지방 일대에서 출토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유명한 고린도 항아리가 있고 검은 색조의 그림이나 붉은 색조의 그림이 그려진 토기들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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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기념교회당에 있는 사도바울을 그린 성화 
 


아크로 코린스


희랍인들은 도시의 높은 곳을 아크로(akors)라고 불렀고 그곳에 신전을 세우곤 했다. 고대 고린도 당시 아크로 코린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에는 1000여 명이 넘는 히에로두로이(국가 공인 신전 직속의 창부)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여 사제들의 관능적인 춤은 이 신전을 유명하게 했고 도시 세수입의 상당 부분은 이 신전에 의존했다고 전해진다. 로마가 이 고린도를 지배할 때는 “모든 배가 고린도에 들리는 것은 아니다(누구에게나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란 뜻의 유행어가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시지프스의 신화


이 아크로 코린스의 높은 산은 고린도를 건립한 시지프스가 형벌을 받은 산이라고 알려진 산이다. 시지프스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크고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용한 노동만큼 가혹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신들의 결정이었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버린다. 다시 바위를 옮기기 위해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시지프의 모습은, 오늘날의 노동자들의 삶과도 비슷하다고 생각되어 철학자 알베르 까뮈는 그의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를 펴냈다. 인간 부조리의 대한 까뮈의 생각이었다. 시지프스의 신화 첫 문장에서 “까뮈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실이다“란 말로 유명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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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재판을 받은 곳으로 얼려진 베마. 베마는 연단, 혹은 난간이란 뜻이다


베마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던 중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이 지역 총독 갈리오에게 고발을 당한다. 고발을 받은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바울에 대한 고발이 유대인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니 유대인들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연설했던 곳이 베마다. 베마는 난간, 혹은 연단이란 뜻으로 로마시대 정치가들이 대중을 상대로 연설하던 곳이다. 이 베마는 고린도의 아고라 한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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