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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머슴 바울" 머슴 출신 ‘한국인 최초 감리교 목사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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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독일보| 작성일2022-09-21 | 조회조회수 : 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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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바울"이 오는 9월 27일 개막되는 제19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래는 작년에 이 영화에 대해서 소개한 기독일보 기사이다.]


성탄절인 25일 오후 11시 15분, KBS 1TV에서 최초 뮤지컬 다큐멘터리 형식의 '머슴 바울, 김창식'이 방송되면서, 김창식 목사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여러 자료에 의하면, 김창식(金昌植) 목사는 1901년 5월 14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김기범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평생 48개 교회를 개척했고, 125곳의 교회를 맡아 일했다. 


김창식은 젊어서 고향을 떠나 전국을 방랑하며 양반집 머슴과 마부, 장돌뱅이, 지게꾼 등 안해본 일 없이 살았다. 그렇게 서울까지 와 남대문 시장에서 막일을 하면서 살던 그에게,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괴하여 노예로 팔거나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렸다.


1888년 그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의 집에 '위장 취업(?)'해 들어갔다. 선교사 집 문지기로 출발해 행랑아범처럼 마당 쓸고 장작 패면서, 선교사가 지방 전도를 나갈 때 그가 탄 말을 끌었다. 그러면서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얼마 후 요리사로 승격(?)해 선교사 가족들의 안방 생활까지 관찰했다. 현장을 잡으려 감시를 늦추지 않았고, 이웃 선교사들의 집도 예의주시했다고 한다.


그렇게 2년 동안 선교사 집 '하인'으로 살면서 감시했지만, 소문으로 들었던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헛소문인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그의 '주인'인 선교사 가족들뿐 아니라 주변 선교사들의 행동은 조선 양반들과 달리 겸손하면서도 권위가 있었다.


특히 하인에 불과한 그를 따뜻한 말과 미소로 대하는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아,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런 그에게 올링거는 한글 쪽복음 <마태복음>을 주면서 "5장부터 읽어보라"고 했다. 거기서 그는 가난하고, 슬퍼하고, 목마르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복음을 읽었다.


선교사들은 그의 질문에 상세히 답했다. 지금까지 이런 '주인'은 만나본 적 없던 그는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다.


예수 믿고 세례 받은 김창식은 선교사들의 부탁에 '전도인'으로 나섰다. 1893년 감리교 선교부가 평양 개척을 결정하자, 그는 제임스 홀 선교사와 함께 평양으로 올라가 서문밖에 진료소를 겸한 예배당을 마련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년 후, 수구파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기독교 확산을 막으려 교회 지도자 10여 명을 체포해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을 가했다. 대부분 굴복하고 나왔지만, 김창식은 마지막까지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버텼다. 얻어맞아 초주검 상태에서 선교사들의 항의로 풀려났다.


선교사들이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란 별명을 붙여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후 소천받기까지 그는 바울처럼 전국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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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제임스 홀 선교사와 김창식 목사.
 


김창식 전도인은 1894년 여름 청일전쟁으로 또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됐다. 전쟁의 기운이 돌자, 선교사와 가족들은 서울로 철수했다. 김창식은 약탈과 살인이 난무하며 괴질이 유행하던 평양성에 남아 상처받은 양떼들을 돌봤다.


그는 이제 선교사 없이 혼자서도 일할 수 있는 성숙한 전도인이 됐다. 이에 1899년 다른 곳으로 개척을 떠나 교회를 지었고, 나름의 직책이 필요해졌다.


1901년 5월 9-14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제17회 한국선교회에서는 김창식과 김기범을 목사로 안수했다. 한국교회 최초로 한국인으로서 목사안수를 받은 것이다. 장로교회는 훨씬 후인 7년 뒤에야 길선주 외 6명이 안수를 받았다.


김창식은 목사 안수 후 선교사들의 동역자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1904-1910년에는 영변구역장으로 일했고, 1912년 평양서지방 감리사, 1913년 영변지방 감리사가 됐다. 영변지방은 새로 생긴 지방으로, 평양 서지방 다섯 고을보다 4배 큰 지방이었다.


산세가 험해 한 번만 순행해도 1,720리나 됐는데, 이 넓은 지역을 1년에 2-3번씩 심방했다. 선교사들은 자동자전거(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지만, 김 목사는 주로 도보로 다녔다.


1918-1921년 수원 지방의 순행목사로 파송받아, 감리사 노블과 독립운동을 직·간접으로 돕기도 했다. 1921년 독립운동의 책임을 물어 노블 선교사는 평양으로, 김창식 목사는 해주로 각각 흩어졌다.


그때 해주에는 김창식 목사의 아들인 닥터 김(김영진 장로)이 있었다.김창식 목사는 해주에서 1922년 사경회를 인도하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7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다, 1929년 1월 9일 72세를 일기로 소천받았다.


이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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