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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탑은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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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뉴스M| 작성일2022-06-27 | 조회조회수 : 7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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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과학자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이야기



    우리에게는 ‘컨택트(Contact)’로 알려진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6년 영화 원제는 ‘어라이벌(Arrival)’이고 이것은 SF 소설가 테트창의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김상훈 옮김, 엘리)를 각색한 작품이다. 이 소설을 단편집의 제목으로 삼을 정도로 테드 창이 아끼는 작품이다. 


    내용은 SF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문학서에 가깝다. 지구에 외계인을 실은 비행체가 착륙하자 세계는 외계인과의 전쟁 발발 가능성으로 긴장한다. 외계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언어학자 루이즈(에이미 애덤스분)를 외계 비행체 안으로 투입하는 장면부터가 여타의 SF영화와 다르다. 그들의 언어를 분석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중에 루이즈는 어릴 때 죽은 딸의 모습을 본다. 이 글이 영화 리뷰가 아니므로 필요한 부분만 설명하자면 루이즈가 본 딸의 환영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에게 닥칠 미래의 모습이다.


    외계인의 시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 아니 순서가 없이 섞여 있다. 그들에게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란게 없다. 하나님의 시간이다. 시간 역시 그 분의 창조물이므로 때로는 ‘헛되었다가(전도서)’ 가끔은 그 옛날 당신이 세웠던 업적을 거창하게 나열하며 생색을 내기도 한다(욥기). 그분의 자의(恣意)다. 예정 안에 이미 택정(擇定)이 있고 동시에 택정이 예정이 된다.


    드니 빌뇌브가 감독을 맡기 전 봉준호 감독에게 먼저 의뢰가 갔었는데 시나리오를 다시 쓰겠다는 봉준호의 제안을 제작사가 거절하면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종교적 시간관을 한국의 감독들은 이해못할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소비되는 성서와 기독교는 대부분 조롱으로 희화화 된다. 한국 교회들이 보여주는 모습에 포복절도할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성서를 개그의 소재로 삼는 목사들의 수준이지 성서 세계관의 문제는 아니다.


    미우나 고우나 오랜 세월 동안 철학과 신학, 예술과 문학의 단골 소재였던 성서를 목사, 신도, 영화인 할 것없이 개그 대본 정도로 소화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미래 속에 나타난 과거를 이야기 한다면 이 단편집의 제일 앞에 수록된 테드창의 데뷔작 바빌론 의 탑’은 과거 속에서 미래를 찾는 이야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중앙북스)’도 언어학자인 저자가 1975년 인도의 라다크 마을을 방문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의 과거의 경험 안에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다. 바벨탑의 가장 중요한 결말인 언어의 분화가 이 소설에서는 다뤄지지 않지만 작가의 SF 작법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 인문학적, 아니 신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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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브뤼겔, 바벨탑, 1563
     

     

    테드창은 미래가 소재일 수 밖에 없는 SF를 멀리 바벨탑 시대로 소급한다. 하늘에 닿기 위한 바벨탑 건설의 노동자 이란 출신의 힐라룸은 완공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설렘과 두려움 속에서 보낸다. 설렘은 곧 야훼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이고, 두려움은 이러한 거대한 토목공사를 과연 야훼께서 기꺼이 환영할 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다.


    탑을 오르는 여정의 이 단계에서 힐라룸은 몇 번이나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알고 지내던 세계를 떠나보내고, 그 세계와 소원해진 듯한 느낌이 그를 괴롭혔다. 대지는 불충의 죄로 그를 추방하고, 하늘은 그를 거부하는 기분이었다. 야훼가 어떤 징조를, 인간의 이 역사役事를 승인한다는 확답을 내려주기를 그는 갈망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혼을 결코 따뜻이 환영해주지 않는 이런 장소에 어떻게 계속 머물러 있는단 말인가?(바빌론의 탑)


    지상에서 걸어서만 4개월, 거기에 등짐을 져야 하는 건축자재가 있으면 시간은 더 길어진다. 그럼에도 고대인들은 몇 세대를 거쳐 그것을 해냈고 이미 태양보다 높이 올라 갔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발아래 가림막을 쳐야 했다.


    마침내 하늘과 지상 사이의 천개(天蓋)을 뚫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두꺼운 화강암 두껑이 뚫렸을 때 하늘 저수지에서는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내렸다. 뒤 따르던 건설 노동자들이 땅 쪽을 향한 수로의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아 버렸다. 힐라룸은 하늘 저수지에 갇혀 거대한 물길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탑을 짓거나 천장을 뚫으라고 인간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탑을 건설한다는 선택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었고, 그들은 다른 인간들이 지상에서 일하다가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일을 하다가 죽어가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정당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그들의 행위의 결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줄 수는 없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올라왔다. (바빌론의 탑)


    힐라룸이 물길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였다. 거대한 홍수로 인한 상처 투성이의 그를 향해 사람들이 걱정스레 물었다. 드디어 천국에 왔구나! 대화를 몇마디 나누던 중에 아뿔사, 그곳은 하늘이 아니라 지상이었다.


    고대에 쓰던 원통 인장처럼 세계의 처음과 끝이 동글게 말려 연결되어 있었다. 지상의 세계가 하늘을 향해 가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원래의 곳으로 돌아오는 구조였다. 땅과 하늘이, 시작과 끝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욕망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를 관통한 시도들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니체는 이것을 영원회귀라고 불렀다.


    테드 창은 ‘바빌론의 탑’에서 힐라룸이 도착한 탑의 정점이 이 세상이었지 바벨탑이 무너졌다고 결코 이야기 하지 않는다. 힐라룸이 하늘이라고 착각했던 지상에서 만난 사람들도 바벨의 건설이 현재 진행형이라고 언급한다. 바벨이라고 이름 붙은 이 무형의 건축물은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하면서 수많은 돌아옴(회귀)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는 이렇게 독해해야 한다고 창조과학자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 있지도 않는 유적물을 찾았다고 왜곡하는데 힘을 쏟지 말고 그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사유하라는 말이다. 테드 창이 성서를 왜곡했다고? 그는 문자주의자라고 할 만큼 성서의 진술을 그대로 풀어 낸다.


    하나님이 이처럼 창공을 만드시고서, 물을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로 나누시니, 그대로 되었다.(창세기 1:7, 새번역)


    힐라룸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창공위에 있는 물을 잘못 건드렸다가 물벼락을 맞았다. 그 거대한 물줄기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하나님이 게신 곳이었다.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세기 1:2).”


    그런데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움직이며 살아가는 지상의 공간이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7:27-28)


    게다가 작가는 바벨탑 설화는 바빌론의 지구라트 설화를 차용했다는 주장조차도 폐기한다. 소설에 따르면 바벨탑은 지구라트와 따로 존재했던 건축물이었다.


    아~은혜다.


    김기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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