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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유괴범의 역설, 《소리도 없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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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당당뉴스| 작성일2021-01-12 | 조회조회수 : 1,3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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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소리도 없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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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동물도 생명을 지닌 존재이니 윤리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동물을 학대할 경우 법으로도 제재를 받고 있지만 아무리 동물들을 잔혹하게 다루더라도 이를 처벌할 법적인 근거가 전무했던 시대도 있었다. 인류 역사 속에서 현대적 의미의 동물보호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놀랍게도 히틀러였다. 수백만의 인간 생명을 학살하는 데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 동물 생명을 보호하는 법의 기초를 놓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히틀러는 실제로도 동물들을 사랑했다 전해진다. 그렇게 동물을 사랑했던 사람이니 우리는 그의 악행에 대해 어느 정도는 눈감아 주어야 하는 것일까? 


    분명하고도 절대적인 악인이 가끔씩 호의와 선의를 베푸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할 때마다 아내와 자식들을 구타하고는 술이 깬 다음 날 간식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처럼. 그러면 그 간식을 먹으면서 자식들은 생각한다. “아버지가 이렇게 우리를 때리긴 해도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분명해.” 이와 비슷한 일은 군대에도 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학대하던 선임이 어느 한 순간 뜻밖의 친절을 베풀 때, 이유 모를 감동이 벅차오르고 심지어 그를 존경하게 되기까지 하는 경험. 말하자면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인 셈이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아버지와 선임은 그래도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착한 사람들일까?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어떤 사람을 묘사할 때 앞에 붙이는 ‘그래도’라는 말은 모든 심판을 중지시키려는 말처럼 보인다. 아무리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라도, 그래도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에게도 친절과 호의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홍의정 감독의 영화 《소리도 없이》는 마치 이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인 것 같았다. 주인공 태인은 누가 봐도 불우하게 자랐고 지금도 이용만 당하고 있는 청년이다. 그를 돌봐주며 일을 시키는 창복은 분명히 그를 착취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태인은 그저 가축처럼 창복이 시키는 일만 하고 죽지 않을 만큼의 대가만을 받으며 어린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중이다. 창복과 태인은 계란을 파는 일 이외에 시신 처리를 포함하여 범죄 조직의 살인현장을 정리하는 부업을 하고 있다. 


    그러던 두 사람은 우연히 유괴된 여자아이 초희를 억지로 떠맡게 되고 유괴의 장본인이 죽게 되자 이 아이를 두고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사는 자기 집에 초희를 데리고 있게 된 태인. 여러 사건을 겪으며 초희와 태인 사이에는 점점 신뢰와 정이 싹튼다. 흔히 보는 영화에서 그렇듯. 그런데 일견 그렇게 보이던 영화는 갑자기 전혀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모든 면에서 익숙한 장면들을 비튼다. 클라이맥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초희가 태인을 가리켜 그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은 영화 속에서 보여준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뒤엎는다. 아무리 호의와 친절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아름다운 신뢰와 정이 피어났다 하더라도, 심지어 이타적인 행위를 선사했다 하더라도, 전체의 사태를 명명하는 가장 단순한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그 단순한 진실의 이름은 이것이다. 범죄.


    창복은 시신을 묻는 태인 옆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며 성경을 손에 들고 진심으로 망자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 그러면 창복은 그래도 선한 인간인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고 단지 뒤처리만 했으니 그래도 그나마 괜찮은 것인가? 태인은 자신 역시 환경의 피해자로서 착취당하는 삶을 살았다. 심지어 그는 초희를 구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니 태인은 그래도 선한 인간인가? 선과 악 사이를 떠도는 쉽지 않은 질문들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 사도 바울은 말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이 말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모양이라도 악은 악일 뿐이다.” 사도의 말이 옳다.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있는 것이다. 어떤 모양을 지니고 있든, 비록 악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심지어 좋은 모양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악은 그저 악일 뿐이다.


    이진경  |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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