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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가 회고 하는 선교사 "최찬영 선교사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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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작성일2021-01-28 | 조회조회수 : 2,88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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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온 선교사였습니다.”



    오영철목사(태국 치앙마이 미얀마 난민 카렌족의 거주지 실로암신학교 교수로 사역중인 합동측 선교사다. 한국교회(영락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로 태국과 중국에서의 사역에 대하여 회고한 것을 허락을 받아 게재한다. 한경직목사는 1950대 현 CCA(아시아교회협의회)의 전신인 EACC준비 총회에 참석후 방콕을 경유한 귀국 길에 당시 방콕의  도시화된 문명과 불교 문화에 대한 충격을 받는 다.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의 인도차이나 지역에서의 선교벨트에 힘을 보태기 위하여 아시아의 중심권인 태국의 복음화에 큰 비전을 갖고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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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찬영선교사 부부와 오영철선교사 부부


    스승이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한국 사회가 불행하다는 것은 풍요로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참된 스승을 찾기가 어려워서일 것이다. 선교사인 나에게 큰 행복은 큰 산과 같은 스승이 있다는 것이다. 그분의 선교사역은 물론이고 그의 고백과 삶의 자세가 나에게 큰 스승이다. 그분은 올해 만 95세가 되는 최찬영선교사님이시다. 그는 해방 후 한국교회가 파송한 첫 선교사다. 1955년 4월에 파송예배를 드렸고, 1956년 6월에 태국에 도착하였다. 37년동안 선교사로 섬기다가 1992년 65세의 나이에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에도 선교를 위한 그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한국선교의 큰 나무로 일생을 살아왔다.


    그는 서울영락교회(한경직목사)의 파송을 받아 1956년 6월에 태국에 도착하였다. 그가 태국에 입국한 1956년의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한 나라였다. 1956년 한국의 개인 GNP는 66불이었다. 태국은 138불이었으니 태국 국민 소득은 한국의 두 배가 넘었다. 미국은 2,674불이므로 숫자로만 보면 40배 이상으로 도저히 비교대상이 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사실 당시 한국은 재정적으로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한국 전체 수입의 13%와 한국 정부 예산의 40%이상이 미국정부의 지원이었다. 미국에서 지원 받은 밀, 보리, 쌀 등 때문에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생존이 어려운 시대였다.


    “당시 태국교회는 한국에서 온 선교사에게서 사역비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국가에서 온 한국 선교사를 위하여 태국교회가 주택을 준비하여 주었습니다.” 선교지 교회인 태국기독교총회(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도 가난한 한국의 상황을 잘 알아서 선교사를 위한 주택을 제공해 주기로 하였다. 당시 영락교회는 김순일선교사도 함께 파송을 했다. 두분이 함께 사역을 하시다가 통합과 합동이 분열한 이후에는 어느 소속도 아니셨는 데 그가 현지에서 협력하는 교단인 태국기독교협의회(CCT)가 에큐메니칼한 단체이기에 때문이다. 그러나 김순일선교사는 합동으로 이적을 하신 것으로 알려졌고 앞으로 이분에 대한 사역도 증언이 필요하다. 


    당시 최찬영선교사는 월 120불을 지원받았는 데 한국의 국민당 1년 GNP가 66불이었으니 최선을 다하여 지원한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지 태국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장 태국어를 배우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유일한 언어학교였던 Union Language School의 1명의 학비는 한 달에 120불이 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잊을 수 없는 미국장로교 (PCUSA) 선교사가 있다고 한다. 1946년 미국장로교에서 파송된 어니 포그 (Ernest Fogg) 라는 선교사였다. 당시 태국에 있던 미국장로교 선교사 약 70명의 부 대표로 있었다. 그는 최찬영선교사의 인물 됨을 알아보고 티를 내지 않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도와주었다. 최찬영선교사가 언어를 배운지 10개월 정도 되었을 때 방콕에서 있었던 부활절 연합집회에 설교자로 초대하였다. 아직 1년도 안된 가난한 국가에서 온 동양 선교사에게 중직을 맡긴 것이다. 어니 포그는 출신국가의 형편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선교사의 능력과 됨됨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본래 사역이 BIT 라는 중국장로교에서 세운 신학교에서 교수사역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몇 개월 정도는 그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런데 갑자기 방콕에 있는 2교회의 담임목사로 변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2교회 당회장이었던 어그 포그 선교사가 그렇게 제안한 것이다. 그가 보았을 때 앞으로의 사역을 위하여 2교회 담임목사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2교회 담임으로 있을 때 기대치 않았던 자동차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것도 어니 포그 선교사의 배려 때문이다. 1958년 어니 포그는 EACC(East Asia Christian Conference) 에서 최찬영선교사를 위하여 차를 구입하여 줄 것이라고 하였다. 한 선교사가 임기를 마치고 출국하면서 좋은 가격으로 차가 나왔는데, 1500불이라고 한다. 물론 최찬영선교사는 그 내용도 모르고 차를 살 형편도 안되었다. 그 액수는 한국선교사의 1년 선교비보다 많은 큰 액수였다. 어니 포그 선교사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의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도록 일부러 EACC 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도와 준 것이다.


    태국 성서공회 사역


    최찬영선교사가 태국성서공회총무로 섬기게 된 것도 어니 포그 선교사 때문이라고 한다. 태국 전체를 위해 중요한 자리였다. 1890년부터 1962년까지 미국인들이 태국성서공회 총무를 하였다. 이제 때가 되어 태국인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하는데, 태국인 가운데는 그럴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아시아인이 하는 것으로 정리를 하였다. 그 때 최찬영선교사를 강력하게 추천한 인물로 어니 포그 선교사로 추정하고 있다. 최찬영선교사를 파송한 국가의 형편을 보지 않고 한 선교사의 인물 됨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956년 일반적인 미국인들이 이해하는 한국은 소망이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그곳에서 온 선교사는 가난한 국가의 상황과 단절될 수가 없었다. 가난하면 무시 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일반 세상의 질서이다. 그렇지만 미국 장로교선교사(PCUSA)는 깊은 배려와 도움으로 한 선교사를 세워주었다. 그런 배려가 있었기에 가난한 국가에서 파송된 선교사는 초기 정착, 이후 사역 발전, 리더십 계발과 선교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전체 37년의 선교사역중 30년을 성서공회에서 섬겼다. 이는 그의 선교사 생애 대부분을 성서공회에서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가 태국 라오스 성서공회의 총무로 섬기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1962년 미국에서 유학을 마칠 즈음에 미국성서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약속을 하고 당시 총무인 홈 그렌과 펜실베니아의 한 유명한 호텔에서 만났다. 태국과 라오스의 성서공회가 이제 서양선교사가 하던 시대를 정리할 때가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시아인이 섬겨야 할 때인데, 적당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였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태국의 신학교에서 교수로 사역하면서 ‘물소신학’을 주창한 바 있는 일본인 고스케 고야마 교수와 필리핀 출신으로 미디어 선교를 하는 솔리스 선교사를 추천하였다. 홈 그렌 총무는 그들은 지금 적당한 자리에 일하고 있으니 최찬영선교사에게 총무를 하면 어떻겠는가 제안을 하였다. “저는 전도를 위해서 태국에 왔지 그 일에 관심도 없고 맞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사실 성서공회 총무라는 자리는 태국 전체에 큰 영향력을 있는 자리였다. 이 자리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한 달여 만에 그를 파송한 한경직목사에게 편지가 왔다. 성서공회 총무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리이니 수락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총무 준비를 위한 오리엔테이션 도중 성경과 전도에 관한 책을 보면서 성경배포가 전도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1978년 그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총무로의 섬김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한다. 그 때는 태국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를 잘 마무리 하고 미국에서 일을 하다가 필리핀에서 반포책임자로 있을 때였다. 성서공회 세계 이사회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총무로 최찬영선교사를 결정하였다고 하면서 연락이 왔다. 그의 대답은 일반적이 않았다. “저는 그런 큰 일에 필요한 행정이나 커뮤니케이션에서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세계 인구의 55%를 차지하는 방대한 지역이다. 행정업무처리와 커뮤니케이션 등에서 너무 부담이 될 것 같았다. 이런 대답 이후 3주 동안 수락한다는 답이 없자 세계성서공회 본부에서는 다시 연락이 왔다. 한번 뉴욕의 성서공회 본부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중국 남경에서의 성경반포 사역


    그가 총무로 섬기는 동안 기적 같은 일이 중국에서 일어났다. 외부에서 성경 반입이 불법인 공산국가 중국의 난징(南京)에 세계 최대의 성경공장이 세워진 것이다. 1987년 12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공장을 통하여 2019년까지 2억권의 성경이 인쇄되었다. 9천만권은 중국인을 위하여 나머지 1억 1천만권은 다른 지역을 위하여 배포되었다. 기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처음 만났을 때 중국정부는 성서공회를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1985년 1월 만날 때까지만 해도 성경인쇄공장은 전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중국교회 담당자들은 미국 NCC가 약속한 중고 옵셋 5만불에 대한 답이 없어서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는 중고 옵셋이 아니라 더 필요한 성경인쇄 공장을 지을 것을 제안하였다.


    도저히 그럴 상황도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돈도 없었다. 중국에 인쇄공장을 세울 것에 대한 의논을 성서공회에서 해 본적도 없었다.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그런 제안에 대하여 신뢰는 물론이고 관심도 표하지 않았다. 다음날 그들은 대신 당장 급한 것을 요청하였다. 중국공산당 정책이 변하여 30여년만에 처음으로 10만권의 성경인쇄를 허락하였다. 이를 위하여 3월 15일까지 그에 필요한 고급종이를 남경부두에 보내달라는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성서공회는 기적적으로 성경 10만권을 위한 종이를 정한 날짜에 준비하여 보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신뢰가 생기고 의논이 시작되었다. 성경인쇄공장 제안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과정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1956년 6월 가난한 국가에서 한 가족의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가 오늘날 28,000여명으로 성장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전 세계에서 역사하신다. 그 하나님께서는 익명의 사람들과 교회들을 오늘도 인도하고 선교를 준비하신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선교하는 선교지 교회일수 있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느낀다고 해서 하나님이 연약하다고 하지 않으신다. 코로나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교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 방법과 지역과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 눈을 떠 우리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장로교(PCUSA) 선교사였던 어니 포그는 그 눈이 있었다. 그런 관점으로 최찬영선교사를 보았고 배려하고 안내하였다. 코로나위기 시대에 우리의 관점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그 길을 갔던 어니 포그(Ernest Fogg)가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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