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빛도 없이"…일본 낙도서 순교한 한국인 여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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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십자가의 길, 일본을 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④순교자 정보옥

▲정보옥 집사가 일본 오키나와현 북대동도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오끼나와에서 350km 남쪽으로 떨어진 일본령 낙도인 기다다이또지마(北大東島)에서 의료사업에 봉사하던 한국인 여의사 鄭寶玉박사(63)가 17일 하오2시께 혼자 사는 기다다이또섬의 「나하」(那霸) 縣立병원부속 기다다이또진료소에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피살체로 발견됐다." (한국女醫師(여의사) 日落島(일낙도)서 피살, 한국일보 1979년 6월 18일)
[데일리굿뉴스] 천보라 기자 = 1979년 6월 18일,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등 주요 신문이 일본 낙도에서 발생한 한국인 피살 사건을 일제히 보도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동쪽으로 약 360km 떨어진 기타다이토섬(北大東島). 피해자는 섬의 유일한 의사, 정보옥 집사(충현교회)였다.
정 집사가 일본 오키나와현 북대동도에 부임한 건 1977년 12월이었다. 서울 성동구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그가 정년 후 안정된 노후 대신 일본의 외딴섬으로 향한 건, 당시 오키나와 낙도의 열악한 의료 환경을 돕기 위해서였다.
1972년 일본에 반환된 오키나와는 기반 시설과 의료체계가 취약했다. 특히 의사가 턱없이 부족해 현하 31개 진료소 중 절반가량이 제 기능을 못 했다고 한다. 일본 당국은 무의촌(無醫村) 해소를 위해 본토에서 의사를 파견해 충원하려고 했으나 낙도로 가겠다는 의사는 없었다.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던 중 떠오른 것이 '한국인 의사 파견제도'였다. 의사 자격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어 국외 의사면허로는 진단은 가능해도 치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한국인 중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해 일본에서 통용되는 자격을 갖춘 의사들이 꽤 있었다.
1974년 오키나와에서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대표단은 당시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와 면담해 오키나와 낙도의 상황을 설명하고 의사 파견제도에 대한 양해를 얻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 도서·벽지 상황도 여의치 않았을뿐더러 강한 반일 정서 등으로 인해 공개적인 모집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대표단은 경주 나자레원 초대 이사장 김용성 장로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김 장로는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하던 부친을 잃고도 해방 후 홀로 된 일본인 아내들과 고아들을 돌보고 한일 민간 교류에 앞장서 온 인물이다. 그는 전국을 돌며 적임자를 찾았다. 응모자 중 15명이 최종 선정됐는데, 정 집사가 유일한 여성이었다.

▲일본 오키나와현 북대동도는 설탕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사진은 섬에 펼쳐진 사탕수수 밭(사진 제공=북대동도 홈페이지 갈무리)
정 집사의 당시 자필 경력서에 따르면, 그는 1939년 일본 도쿄 제국여자의학전문학교(현 도호대학)를 졸업하고 일본 후생성에서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그는 유학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시험 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47년에 의사면허를 취득해 자격을 갱신했다. 전문 분야는 소아과와 산부인과였다.
정 집사는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한다는 조건으로 북대동도에 파견됐다. 일본인에게도 낯선 섬이었다. 가족의 만류에도 그의 뜻은 확고했다. 히가 미키오 당시 오키나와 부지사에 따르면, 정 집사는 부임지를 정하면서 가급적 모두가 꺼리는 외진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일본 낙도행을 결정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북대동도는 오키나와현 다이토 제도를 이루는 3개(미나미다이토섬, 오키다이토섬) 섬 중 하나로, 면적 11.94㎢, 둘레 13.52km의 작은 섬이다. 메이지 시대인 1903년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하기 전까지는 무인도였다. 개척과 함께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됐는데, 섬 전역에 사탕수수 밭이 많아 '설탕의 섬'이라고도 불렸다.
정 집사가 부임할 당시 섬 인구는 649명이었다. 수도시설조차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연간 2,000여 명을 진찰하며 도민들의 건강을 책임졌다. 정 박사가 행한 건 치료뿐만이 아니었다. 가정 방문과 식생활 개선, 고민 상담 등 도민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돌보며 헌신했다. 도민들도 정 집사를 가족처럼 여기고 어머니처럼 따랐다.
특히 그는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했다. 섬의 유일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때마다 교회에 돈을 송금하는 등 신앙생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토속신앙이 강했던 지역 분위기를 고려해 노골적으로 복음을 전하진 않았지만, 정 집사의 성품과 행실은 도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정보옥 집사의 조부는 평양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꼽히는 정익로 장로다. 사진은 왼쪽부터 길선주, 김종섭, 정익로.
그의 신앙과 인류애는 집안 배경에서 비롯됐다. 정 집사의 차남 윤정만 목사에 따르면, 그는 1916년 평양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길선주, 김종섭 목사와 함께 평양의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꼽히는 정익로(鄭益魯) 장로다. 한자의 음의(音義) 정보를 한글로 최초로 풀이한 '국한문신옥편'을 집필·발행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정 장로는 1895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평양에서 출판사 야소교서원(耶蘇敎書院·예수교서원)을 운영했는데, 기독교 선교 센터이자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와 연결된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다. 그는 이로 인해 훗날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특히 정 장로는 일본과 인연이 깊었다. 1908년 옥편 인쇄를 위해 일본 도쿄에 방문한 그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 재일본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현 재일본한국YMCA) 회관에서 김정식 총무와 유학생 10여 명과 함께 예배드렸고, 이를 계기로 대한예수교장로회에 교회 설립을 제안했다. 일본 최초 한인교회 동경교회(현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교회)의 출발이었다.
정 장로가 남긴 믿음의 유업은 정 집사의 삶으로 이어졌다. 의사였던 남편 윤성실 박사를 일찍이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그가 자식들과 손자·손녀를 뒤로 하고 혈혈단신 일본의 낙도까지 자원해서 간 것은 선교사로서의 사명 때문이다. 윤 목사 역시 정 집사가 일본을 향한 사명을 갖고 오키나와행을 결정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보옥 집사(오른쪽)와 남편 윤성실 박사 (사진 제공=윤정만 목사)
그러나 정 집사의 사역은 뜻하지 않게 중단됐다. 그가 부임 1년 반 만에 피살된 채 발견된 것이다. 북대동도에서 일어난 첫 살인 사건이었다. 범인은 범죄 전력이 있는 15세 중학생이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범인은 평소 여성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반복해 왔으며, 소년원 출소 이후에도 동종의 미수사건으로 체포됐다.
도민들은 큰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 정 집사가 출산을 앞둔 도민을 위해 당초 예정돼 있던 딸의 출산과 귀국 일정을 미룬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안타까움은 더했다. 도민들은 만약 그가 예정대로 떠났더라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며 후회하고 자책했다고 한다.
정 집사가 북대동도를 떠날 때 도민 300명 이상이 모여 그를 전송했다. 촌장과 촌의회의원 전원 등 많은 도민이 그의 시신과 함께 배를 타고 오키나와 나하로 이동했다. 오키나와현 주최로 거행된 장례식에는 당시 의사였던 정 집사의 장남 윤정철 박사가 급히 입국해 김경철 당시 주일한국대사관 참사관과 함께 조문객을 맞았다.
며칠 뒤 북대동도에서도 영결식이 열렸다. 도민들은 동사무소에 제단을 마련하고 기독교 장례에 맞춰 나하에서 국화를 공수했다. 윤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초·중학생 100여 명을 비롯해 전 도민이 눈물의 헌화 행렬을 이어갔다. 윤 박사는 만전을 기해도 막지 못하는 사고가 있을 수 있다며 오히려 도민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6월 25일 서울 강남구 충현교회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일본에서 히가 부지사와 촌장 등이 참석했다. 사건이 이미 보도된 만큼, 감정이 고조되거나 일본 당국을 향한 규탄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가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로 대응했다. 윤 박사는 사건의 배경에 민족적 차별은 없었다고 호소하며 언론과 사람들을 잠재웠다.
윤 박사는 훗날 "범인이 15세라고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며 "당시 고소해서 국제 문제로 확대하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범인을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마음도 희미해졌다"며 "어머니는 하늘에서 범인을 용서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도민들은 정 집사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우고 매년 기일마다 그를 기렸다. 사진은 현재 북대동도 마을 청사 내 세워져 있는 '고 정보옥 선생님 지비' (사진 제공=북대동도 진흥기구)
정 집사가 떠나고 1년 뒤, 북대동도 주민들은 마을 청사 내 '고 정보옥 선생님 지비'라는 문구를 새긴 약 2미터 높이의 추모비를 세웠다. 그리고 매년 6월 17일 정 집사의 기일이 오면 도민들이 추모비 앞에 모여 그를 기렸다. 정 집사를 추모하는 행사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도민들의 말을 빌리면, 정 집사는 단지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랑 그 자체였다.
북대동도 진흥기구의 한 관계자는 "사건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정보옥 선생님께서 이 작은 섬에서 의료에 헌신해 주신 것에 대해 섬 주민들은 계속해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할 것"이라고 밝혔다.
1970년대 해외 선교는커녕 해외 방문조차 어려웠던 시절, 한국과 원수 된 일본의 땅끝으로 자원해 간 한국인 여의사. 정 집사는 병자를 고치고 생명을 살리며, 자신을 희생해 헌신한 땅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은 비극이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인이 사죄하고 한국인이 용서하는 화목의 역사가 쓰여졌다.
정 집사의 삶은 하늘 영광 버리고 죄인인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영혼들을 고치시고 살리셨지만 버림받고 죽임당하셨던, 그러나 십자가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에게 화목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됐다.
그가 떠난 지 46년이 지났다. 정보옥의 이름은 세상에서 잊히고 있지만, 일본의 외딴섬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그의 삶은 우리에게 '어린 양'의 길을 가리키는 지표로 남았다. 고난 주간, 어떤 이들은 그 좁은 길 안에 감춰진 부활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데일리굿뉴스 천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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