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일기] 2026 노벨문학상 기념 독후감: 앤 카슨, 『Autography of Red (빨강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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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의 고전학자이자 시인, 소설가인 앤 카슨(Anne Carson, 1950–)이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2년 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터에, 영문학도로서 이번에는 캐나다 작가의 수상 소식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캐나다 태생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는 솔 벨로(1976), 앨리스 먼로(2013)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합니다. 다만 솔 벨로는 미국 작가로 활동했으니, 캐나다 문학의 수상자로는 앨리스 먼로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몇몇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니 카슨이 젊은 시절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테뉴어(Tenure)를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가십거리 삼아, 미국의 명문대학이 노벨상 받을 인재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식으로 흉을 보는 글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글쎄요. 제 생각은 그저 "그래서 어쩌라고?"입니다.
저는 오히려 캐나다에서 태어나 토론토대학교에서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캐나다에서 테뉴어를 받고 고전학을 가르치고 글을 써온 여성 학자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고 좋았습니다. 굳이 미국 명문대학의 안목을 들먹여야 그녀의 성취가 더 빛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무튼 수상을 기념하여 이번 주말에는 그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빨강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Red, 1998)을 읽었습니다. 영문판으로 150쪽 남짓한 작품이니 중편소설 정도 되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 참 독특합니다. 아니, 독특하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합니다.
학술서인지, 시집인지, 소설인지, 문학비평인지, 아니면 고대 시인과의 인터뷰집인지 도무지 장르를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헌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현대 소년의 성장담으로 넘어가고, 시를 읽고 있는가 싶으면 철학적인 문장들이 튀어나옵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도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져 누가 말하는 것인지, 지금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짧은 책을 읽는 동안 무려 세 번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졸음에 빠지는 위기. 예전에 T. 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를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그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장까지 넘겼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이상하게도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만큼이나 기묘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특별히 세 가지 점에서 놀랐습니다.
첫째, 고대 그리스 시인 스테시코로스(Stesichorus)의 놀라운 역발상입니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는 열두 가지 과업 가운데 열 번째로 세 몸이 붙은 괴물 게리온(Geryon)을 죽이고 그의 소떼를 빼앗아 옵니다. 영웅이 괴물을 물리치는 익숙한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기원전 6세기의 시인 스테시코로스는 이 이야기를 뒤집어 버립니다. 괴물을 죽인 헤라클레스의 입장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에게 죽임당하는 게리온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간 것입니다. 그에게도 어머니가 있었고, 지키고 싶은 개와 소떼가 있었으며,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 있었지만 지키려는 명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싸우러 나가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게리온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생각해 보니 참 놀랍습니다. 우리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기 삶을 파괴하러 온 괴물일 수도 있다는 발상입니다. 괴물인 게리온이 영웅이되고 영웅이었던 헤라클레스가 괴물이 되는 이야기. 무려 2,600여 년 전에 이런 시선으로 신화를 다시 쓴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제게는 무척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앤 카슨은 여기에서 한 번 더 이야기를 비틀어 버립니다. 고대의 괴물 게리온을 현대 사회로 데리고 옵니다.
둘째, 현대의 게리온은 더 이상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 하는 감수성 넘치는 소년입니다.
게리온은 빨간 몸과 날개를 가진 아이입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았고, 그 다름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합니다. 어린 시절 형에게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의 깊은 상처를 알지 못하고, 결국 보호해 주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게리온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기만의 내면세계로 숨어들어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살 위의 헤라클레스를 만납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서로 사랑에 빠집니다. 게리온에게 헤라클레스는 자기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첫사랑입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에게 사랑은 게리온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는 육체적 관계에 더 관심을 보이고, 끝내 게리온을 떠나 버립니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싶었던 게리온은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헤라클레스 곁에 앙카시(Ancash)라는 또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앙카시는 게리온의 감춰진 날개를 발견하고, 그에게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기를 권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조금 기대했습니다. 아, 이제야 게리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는구나!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앙카시 역시 게리온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합니다. 도대체 이 불쌍한 게리온은 언제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에는 형에게 상처받고, 성장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고, 자신을 이해해 줄 것 같던 사람에게서도 상처받습니다. 그런데 게리온은 끝내 자신의 날개를 버리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숨기고 묶어두었던 그 날개로 다시 날아오르려 합니다. 그가 정말 자유로워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그조차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셋째, 앤 카슨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이야기들을 모조리 비틀어 버립니다.
영웅과 괴물의 이야기,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인 사랑 이야기,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의 관계, 심지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소설의 형식까지 말입니다.
헤라클레스는 과연 영웅일까요? 게리온은 정말 괴물일까요?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그리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이런 질문들이 뒤엉키면서 소설은 마치 현대인들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영웅놀이를 하면서 누군가의 괴물이 되고,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처를 주고,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 오해하며, 자유를 원하면서도 누군가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카슨은 이 모순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여줍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게리온과 헤라클레스, 앙카시는 함께 서있습니다. 그리고 화산의 불로 빵을 굽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여전히 세 사람은 함께 있지만 그 관계는 복잡하고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문장들은 이렇게 열린 채로 끝납니다:
We amazing beings,
Geryon is thinking We are neighbors of fire.
And time is rushing towards them
where they stand side side with arms touching, immortality on their faces,
night at their back
참 묘한 결말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그는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과 상처를 안고 밤을 등지며 함께 서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저는 왠지 슬프고 답답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사랑받기를 갈망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누군가는 영웅이라고 칭송받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자기만의 날개를 펼치려고 애쓰는 사람들.
스테시코로스가 헤라클레스의 영웅담을 한 번 뒤집었고, 앤 카슨은 그것을 또 한 번 뒤집었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신화와 사랑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들이 완전히 낯설어졌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독창성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더 이상 이렇게 비틀어진 현실을 또 비틀어 이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조금 덜 아프게 하며, 저마다 가진 날개를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캐나다 여류작가 앤 카슨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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