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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빙점』 16. 게이조: 정의의 얼굴을 한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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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9-29 | 조회조회수 :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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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에서 복수는 언제나 흉악한 얼굴로 나오지 않습니다. 때로 복수는 정의의 얼굴을 하고 옵니다. 질서 있고, 냉정하고, 논리적이며, 심지어 도덕적인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복수는 자신을 복수라고 부르지 않는 복수입니다.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에서 게이조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게이조는 의사입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지적이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딸 루리코를 잃은 아버지이고, 아내 나쓰에의 배신으로 상처 입은 남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독자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낍니다. 그는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미우라는 그 피해자의 마음속에서도 죄가 자랄 수 있음을 집요하게 보여 줍니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라이와 밀회하는 동안 루리코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때 그의 슬픔은 곧 분노가 되고, 분노는 복수의 계획으로 굳어집니다. 그는 살인범 사이시 쓰치오의 딸이라고 믿은 요코를 양녀로 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죽은 딸을 대신할 아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나쓰에를 벌하기 위한 정교한 장치였습니다. 최순육의 연구도 게이조가 나쓰에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동시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서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지 시험한다고 분석합니다. 


여기서 게이조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그는 죄를 심판하려 하지만, 그 심판 자체가 또 다른 죄가 됩니다. 그는 나쓰에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의 죄는 보지 못합니다. 그는 아내의 욕망을 심판하지만, 자기의 복수를 정의라고 부릅니다. 그는 요코를 받아들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쓰에의 마음에 칼을 꽂기 위해 받아들입니다.


『빙점 해동』은 게이조의 행위를 “거짓 용서와 거짓 수용”으로 읽습니다. 원수의 아이를 받아들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용서가 아니라 복수였습니다. 수용처럼 보였지만,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품은 것이 아니라 상처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빙점』이 인간의 죄를 얼마나 깊이 보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선한 행위의 모양으로도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로도 누군가를 벌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형식으로도 복수할 수 있습니다.


게이조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분하게 계산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차분함이 무섭습니다. 뜨거운 분노보다 차가운 복수가 더 깊이 사람을 해칩니다. 뜨거운 분노는 때로 금방 드러나지만, 차가운 복수는 오래 숨어 관계 전체를 얼립니다. 『빙점』의 제목처럼 게이조의 내면은 빙점에 이릅니다. 사랑이 흐르지 않고, 용서가 멈추며, 슬픔이 생명의 눈물이 아니라 복수의 결정체가 됩니다.


게이조는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나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 앞에서 깨어지는 것은 다릅니다. 『빙점 해동』은 게이조가 이 말씀을 자기 자존심과 복수의 마음으로 오독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말씀 앞에서 자신이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보아야 했지만, 오히려 그 말씀을 자기 능력의 시험대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종교적 인간의 위험입니다. 말씀을 통해 회개하지 않고, 말씀으로 자신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칼로 받아 자기 죄를 찌르기보다, 그 칼을 남에게 겨누는 것입니다. 게이조는 나쓰에를 심판하면서, 자신이 이미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섰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자리는 다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심판자가 아니라 죄인으로 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원수였으나 사랑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게이조의 비극은 나쓰에를 벌하려다가 자기 영혼을 감옥에 가둔 데 있습니다. 복수는 상대를 향해 던진 칼 같지만, 결국 자기 가슴에도 박힙니다. 최순육은 게이조가 복수하려 했지만 가장 처절하게 복수당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후회하는 장면을 죄 인식의 중요한 대목으로 해석합니다. 


오늘 우리도 게이조의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구를 벌하고 있는가?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상대가 고통받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신앙의 언어로 내 복수를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빙점』은 말합니다. 정의의 얼굴을 한 복수도 죄입니다. 참된 정의는 하나님께 맡길 때 시작되고, 참된 용서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본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게이조의 얼어붙은 마음은 오늘 우리의 마음속 빙점을 조용히 비춥니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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