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일기] '모차르트는 건드리지 말어!': 바르트와 반틸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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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Conference: Neo-Calvinism and Barthianism 2026” 학회에 참석했을 때, 여러 훌륭한 발표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들었던 강연은 독일의 신학자이자 신칼빈주의 연구자인 카이-올레 에버하르트 (Kai-Ole Eberhardt) 교수의 “Barth and Kuyper” 였습니다.
강연은 20세기 개혁신학의 두 거대한 흐름, 즉 신칼빈주의와 칼 바르트 사이의 오랜 애증(愛憎)의 관계를 다루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처음부터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1921년 바르트가 독일 괴팅겐대학교의 개혁신학 교수로 부임했을 때, 네덜란드의 신칼빈주의자들은 이 젊은 스위스 신학자를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계시, 말씀의 주권을 그토록 강하게 외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자신들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독일 개혁파 교회 목사로서 카이퍼를 독일에 소개하고 있던 빌헬름 콜프하우스 목사를 통해 바르트에게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책들을 보냈습니다. 바르트가 네덜란드어를 읽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화란어-독일어 사전까지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트에게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신학 기숙사 장학금(Konvikt)을 지원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바젤 학회의 소개글에도 이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Just send him Kuyper’s and Bavinck’s books and he will become one of us.” (바르트에게 카이퍼와 바빙크의 책을 보내주면 결국 우리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 바르트는 그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칼빈주의, 특히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종합적 세계관으로 발전시켜 정치와 교육, 문화 전체에 적용하려는 카이퍼의 구상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이 소유하고 운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독교적 체계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였습니다. 다만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 대해서는 상당한 존중을 보였고, 실제로 자신의 교의학 작업에서 바빙크의 삼위일체론과 '데우스 딕시트 (Deus dixit,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개념을 긍정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르트가 바빙크에게 받은 신학적 영향과 수용을 연구하는 논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두 진영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특히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받아들인 이른바 ‘바르티안’들이 카이퍼 계열의 신칼빈주의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동료가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바르트가 어느 순간 자신들의 신학과 문화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무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호의는 의심으로, 의심은 논쟁으로, 논쟁은 점차 적대감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이 오래된 갈등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면서 결정적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웨스트민스터의 전제주의자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입니다.
반틸의 바르트 비판은 무서울 정도로 집요했습니다. 반틸은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르트 신학을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인 바르트 비판서 제목부터가 『The New Modernism』(신모더니즘, 1946) 이었습니다. 반틸에게 바르트의 신학은 단순한 학문적 견해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전제부터가 다른, 성경과 계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전체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비판은 매우 거칠었습니다. 바르트 신학을 가리켜 "교묘하게 포장된 인문주의"라 부르며, 바르트를 사실상 변장한 이단이나 다름없다고까지 몰아붙였습니다.
바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평생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앙을 유럽에서 지켜왔는데, 반틸은 그런 자신을 오히려 자유주의의 가장 위험한 변종이라고 공격하고 있었으니까요.
에버하르트 교수의 강연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모차르트 이야기였습니다. 바르트가 특별히 사랑했던 두 인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스위스 바젤에 있는 바르트의 사저 서재에 가보면 두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장 칼뱅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입니다. 바르트는 『칼뱅』에 관한 연구서를 썼고, 후일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에는 『모차르트』라는 수필집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바르트에게 모차르트는 단순히 매일 즐겨 듣는 작곡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창조세계의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이 함께 울리면서도 결국에는 빛과 기쁨이 승리하여 수렴되는 어떤 거룩한 질서를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득한 부정(No)의 소리 가운데서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긍정(Yes)이 울려 퍼지는 희망을 모차르트에게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버하르트 교수는 강연에서 바르트를 향한 보수적 개혁파 진영의 비판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모차르트와 그의 음악에 부여했던 신학적 의미까지 폄하했던 정황을 소개했습니다. 세속 예술가에게 창조의 은혜를 지목하는 바르트의 태도까지 문제 삼는 모습은, 바르트에게는 견디기 힘든 모독이자 좁은 교리주의적 사냥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내 신학을 비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가 노래한 창조의 은혜마저 문제 삼는가." 바르트가 직접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화란계 개혁파 신학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점차 차갑게 굳어갔던 것 같습니다.
결국 1961년,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미국의 보수적 신학자들이 바르트에게 몇 가지 비판적인 질의서를 보냈고, 『교회교의학』의 영어 번역을 주도했던 풀러신학교의 제프리 브로밀리 (Geoffrey Bromiley) 교수가 이를 바르트에게 전달했습니다. 질문을 던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반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르트는 1961년 6월 1일, 브로밀리 박사에게 유명한 편지 답신을 보냅니다. 바르트는 담담하게, 이 사람들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려면 먼저 자신이 그 문제들에 관해 이미 써놓은 『교회교의학』의 수백 페이지를 “읽고, 배우고, 숙고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을 이단으로 낙인찍어 놓고 그 판결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질 뿐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These fundamentalists want to eat me up.”(이 근본주의자들은 나를 잡아먹으려고만 합니다.) 따라서 자신은 그들에게 분노한 답도, 부드러운 답도 줄 생각이 없으며, 오직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 것 (No answer at all)" 을 택하겠다고 단언합니다. 실제로 바르트는 그 이후 반틸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 어떤 학술적 응대나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에버하르트 교수의 강연을 들으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같은 종교개혁의 뿌리에서 나온 20세기 개혁파의 형제들끼리 왜 이토록 서로를 적대해야 했을까? 강연자 에버하르트 교수가 던진 질문 역시 "누가 옳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물었습니다. "과연 이렇게까지 싸워야 했을까?"
카이퍼와 바빙크, 바르트, 반틸 모두 종교개혁의 유산을 자신들의 시대에 살아있는 신학으로 다시 꽃피우려 했던 이들이 아니었냐는 말입니다. 카이퍼는 개혁신학을 세계관과 문화, 교육과 정치 영역 전체로 확장하려 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와 문화, 정치 전체를 다시 엄숙하게 판단하고자 했습니다. 바빙크와 반틸 역시 시대의 사상적 도전과 씨름하며 개혁파 정신을 수호하려 애썼습니다. 방법은 달랐고 신학적 궤적도 분명히 갈라졌지만, 그들이 씨름했던 근본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오늘날 현대 세계에서 어떻게 다시 고백될 수 있는가?"
그래서 에버하르트 교수가 자신의 연구 논문에 붙인 제목도 의미심장합니다. “'Theologians with Style' or 'Man-Eaters'? Karl Barth and Neo-Calvinism”(품격 있는 신학자들인가, 아니면 사람을 잡아먹는 자들인가? 칼 바르트와 신칼빈주의)
저는 특히 이 표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Man-Eaters(사람 잡아먹는 자들)”. 독일어로는 '멘셴프레서(Menschenfresser)'라고 합니다. 신학을 하다가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다니!
하지만, 이 긴 갈등의 역사 뒤에는 참으로 재미있는 후일담이 하나 전해집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제가 자료를 찾으며 알게 된 일화입니다.
1962년, 바르트의 학문적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그는 미국에 초청받아 프린스턴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반틸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반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누군가 바르트에게 “여기 반틸 박사가 있습니다”라고 소개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바르트는 망설임 없이 앉아 있던 반틸에게 다가왔습니다. 자신을 향해 수십 년간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던 사람, 자신이 편지에서 '나를 잡아먹으려는 자'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반틸이었습니다. 바르트는 앉아 있던 반틸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리며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당신이 나를 그렇게 공격하던 반틸이군요. 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I forgive you. I forgive you!”
“I forgive you. I forgive you.”(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라는 문자 그대로의 번역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칠순을 훌쩍 넘긴 노신학자 바르트가 자기보다 열 살가량 어린 반틸에게 보낸 성숙한 태도와, "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하는 동료적 화해의 인사였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바르트를 향해 날 선 비판을 퍼부었던 반틸은 너무나 당황하여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수천 페이지의 신학적 입장과 논쟁이 한순간에 인격과 인격의 따뜻한 만남으로 녹아내린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반틸에게도 작은 변화가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몇 년 후 그는 바르트에게 혹시 자신이 그를 오해하거나 잘못 표현한 것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는 취지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학적 입장 차이를 철회한 것은 아니었고 두 사람이 완벽한 신학적 합의에 도달한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신학을 비판하는 것'과 '사람 자체를 적대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인정할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반틸이 바르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서명란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C. Van Til, Ein Menschenfresser.”(“C. 반틸, 사람 잡아먹는 자로부터”)
저는 이 마지막 서명이 참 훈훈하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한때 서로를 향했던 신랄한 비판과 야유의 단어가, 이제는 과거를 미소 지으며 되돌아보는 유머와 화해의 표지가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끝내 같은 신학적 노선을 걷지는 않았습니다. 반틸은 끝까지 바르트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았고, 바르트 역시 반틸의 비판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억지로 같아질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개성과 긴장 속에서 개혁신학은 스펙트럼을 넓히며 발전해 왔으니까요.
바젤에서 저는 신학의 지식과 내용보다, 신학을 해나가는 '태도'에 대해 오래 생각했습니다. 신학에는 진리를 향한 뜨거운 확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진지하게 묻고, 그릇되었다고 판단되는 주장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견해가 다 옳다고 어설프게 타협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단한 확신이 적대감과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의 신학을 비판하는 것과 상대라는 사람의 존재를 짓밟아 작게 만드는 것 역시 전혀 다른 일입니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글을 더 이상 읽을 필요도, 그 목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다고 단정하는 순간, 대화는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리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조금씩 잡아먹기 시작하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신학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정치의 현장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러므로 당신은 존중받을 가치도, 들을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문장까지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바르트와 반틸은 끝내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어느 날 프린스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으며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더 흐른 뒤, 한 사람은 자신을 향했던 가장 날카로운 비판의 단어를 스스로의 서명으로 품어 안았습니다. Ein Menschenfresser—'사람 잡아먹는 자'.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도, 생각이 달라 치열하게 대립했던 사람들끼리 서로를 바라보며 웃으며 악수할 수 있는 바로 그 정도의 성숙함과 여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달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것, 상대방을 비판하더라도 그의 말을 끝까지 성의 있게 읽어주는 것, 혹 내가 잘못 이해했다면 기꺼이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끝내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라는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
신학을 오래 공부할수록, 저 역시 닮아가고 싶은 사람의 모습은 바로 그런 스타일(품격) 이 있는 신학자입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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