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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일기] 스위스 종교개혁 교회 답사기 2 - 로잔의 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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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9-17 | 조회조회수 :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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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콜람파디우스의 바젤 대성당을 내려오며 그다음 답사할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꼭 가보아야 할 교회로 칼빈이 섬겼던 제네바의 생피에르 대성당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곳을 가기 전 한 곳을 더 둘러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지도상 바젤에서 제네바로 내려가는 길에 들를 수 있는 도시로는 베른, 뇌샤텔, 로잔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눈과 마음이 최종적으로 머물렀던 곳은 로잔이었습니다. 


‘그래, 로잔으로 가자. 그리고 그를 만나보자!’  


바젤에서 기차를 타고 로잔으로 내려가는 동안, 스위스라는 나라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바젤은 독일어권 도시라 분위기가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트램이 오래된 건물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거리에서도 큰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반면 프랑스어권인 로잔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거리는 한층 활기찼고 피부색과 언어도 다양했으며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쳤습니다. 같은 나라임에도 전혀 다른 이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로잔역에 내려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교회, 로잔 대성당(Cathédrale de Lausanne)이었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오르막의 연속이었습니다. 계단을 오르고 좁은 골목을 지나 다시 가파른 길을 올라야 했습니다. 이미 하루 종일 기차와 도보 이동을 반복한 터라 숨이 가빠왔습니다. ‘옛 사람들은 매주 이 언덕을 올라와 예배를 드렸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미치자 문득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한참을 올라 마침내 대성당 앞에 섰을 때, 그 장엄함에 압도되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바젤 뮌스터, 제네바 생피에르 대성당,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등 종교개혁의 대표적 교회들을 둘러보았지만, 로잔 대성당의 규모가 단연 가장 웅장하게 느껴졌습니다. 길이가 거의 1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중세 고딕 양식의 성당이었습니다.  


1536년 10월, 바로 이곳에서 ‘로잔 종교논쟁(Disputation of Lausanne)’이 열렸습니다. 가톨릭 성직자들과 개혁파 목회자들이 모여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놓고 공개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성직자들과 베른의 관리들, 지역 대표들과 시민들이 이 거대한 성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개혁파에서는 파렐과 비레가 논쟁을 이끌었고, 당시 바젤에 머물던 젊은 칼빈도 참여했습니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칼빈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논쟁에서 가장 많은 논제를 담당했던 이가 바로 비레였습니다. 열 개의 논제 중 일곱 개를 그가 맡았습니다. 칼빈은 성찬 논쟁 때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의 글을 남다른 기억력으로 인용하며 개혁파의 논증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이후 약 23년 동안 로잔의 종교개혁과 목회를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피에르 비레(Pierre Viret, 1511–1571)였습니다.  


오늘날 칼빈과 츠빙글리는 알아도 비레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뇌샤텔의 파렐이 프랑스어권 종교개혁의 맏형이었다면, 로잔의 비레는 칼빈보다 두 살 어린 젊고 유능한 설교자이자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칼빈이 제네바의 개혁자로 자리 잡는 데 있어 친구이자 동역자인 비레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칼빈과 비레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1541년 칼빈이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 망명 생활을 마치고 제네바로 복귀할 때도 비레가 먼저 제네바에 들어가 혼란스러운 교회를 안정시키며 칼빈의 귀환을 준비했습니다. 역사학자 브루스 고든은 비레가 제네바를 안정시키지 않았다면 칼빈의 복귀가 가능했을지 의문이라고 평가할 정도입니다.  


그 무렵 칼빈은 파렐에게 “비레가 내게서 떠난다면 나는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다른 편지에서도 비레가 떠날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용기를 잃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비레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칼빈은 큰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레는 ‘종교개혁의 미소’라 불릴 만큼 온화한 인물이었습니다. 유머와 풍자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 칼빈과는 달리 프랑스 남부 불어를 잘했고 대중적 언어로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는 비레에게 칼빈과 파렐이 갖지 못했던 특별한 면모가 있었다며 그를 “a man of the peopl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를 “사람들 속에 함께 있던 사람”이라고 옮기고 싶습니다.  


비레가 어떤 목회자였을지 눈에 선합니다. 늘 미소를 잃지 않고 성도들과 어울리며,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며, 평범한 이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던 목사. 심지어 까다롭고 예민했던 칼빈조차 힘들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비레를 찾았습니다.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가 병들었을 때는 그녀를 로잔으로 보내 비레 부부에게 부탁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자신의 가장 깊은 슬픔을 털어놓았던 존재 역시 비레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터놓고 개혁교회를 함께 섬기던 이들 사이에도 어느 순간 균열이 찾아왔습니다. 파렐은 노년에 연하의 여성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칼빈과 깊은 갈등을 빚었습니다. 오랜 우정엔 금이 갔고, 칼빈이 죽기 직전에야 두 사람은 겨우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비레와 칼빈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고 미묘했습니다. 비레가 섬기던 로잔 교회는 베른 당국의 강한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핵심 문제는 교회가 어디까지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였습니다. 성찬 참여권이나 출교권 같은 교회의 치리권을 교회가 가질 것인가, 아니면 시의회가 가질 것인가를 두고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비레는 칼빈처럼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권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베른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베른 당국은 비레를 비롯한 로잔의 목회자들을 파면했습니다.  


1559년, 약 23년 동안 로잔을 섬겼던 비레는 평생 일군 교회를 뒤로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바로 이 무렵 한 인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훗날 예정론으로 유명해진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입니다. 베자는 칼빈보다 열 살 어린, 뛰어나고 젊은 프랑스 지식인이었습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고전어와 인문학에 깊은 소양이 있던 그를 로잔 아카데미의 인문학 교수로 초청한 사람이 다름 아닌 비레였습니다. 베자는 이곳에서 약 10년간 그리스어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제네바의 칼빈이 베자를 특별히 아끼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프랑스 출신이라는 점, 같은 스승 밑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는 점, 법학이라는 지적 배경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많았습니다. 칼빈은 베자에게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를 차세대 지도자로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비레와 베자의 관계가 점차 갈등구조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로잔에서 10년을 함께 일했으나, 교회와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벌어졌습니다. 특히 로잔의 위기가 깊어질 때 베자는 비레보다 칼빈의 판단을 더 지지했습니다. 1558년 로잔 아카데미를 둘러싼 베른과의 갈등이 심각해졌을 때, 비레는 오랜 친구 칼빈의 지지를 기대했으나 돌아온 것은 뜻밖에도 칼빈의 매서운 책망이었습니다.  


비레에게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 비레를 꾸짖으며 오히려 베자의 판단을 옹호했습니다. “비레가 떠나면 나는 무너질 것”이라 말했던 과거의 칼빈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칼빈의 곁에는 베자가 있었습니다.  


로잔 사태의 여파로 아카데미의 개혁파 교수진이 대거 해임되었고, 수많은 교수와 학생, 목회자들이 제네바로 옮겨갔습니다. 이들은 1559년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의 핵심 기반이 되었고, 그 초대 책임자로 세워진 인물이 바로 베자였습니다.  


비레 역시 로잔을 떠난 후 한동안 제네바에서 칼빈과 함께 사역했으나,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561년 비레는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남부로 향했습니다. 공식적인 사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역사가들은 비레가 더 이상 칼빈의 부관 역할에 머물고자 하지 않았고 베자가 칼빈의 중심에 서게 된 상황에서 제네바를 떠나려 했다고 분석합니다. 1563년 비레는 칼빈에게 중요한 정보를 더 이상 공유받지 못하고 있으며 베자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했음을 느낀다는 섭섭함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아름다웠던 불어권 종교개혁 삼두마차 시절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린 후였습니다.  


저는 텅 빈 로잔 대성당 안에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460여 년 전 이곳을 떠나야 했던 비레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제 마음은 이상하게도 칼빈보다 비레 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비레는 칼빈처럼 거대한 신학 체계를 남긴 이도, 베자처럼 제네바의 후계자로 승승장구한 이도 아닙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제네바에 남아 기득권을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온화한 성품과 탁월한 설교 능력, 오랜 경력은 제네바 종교개혁의 중심 지도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떠났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편안하고 안정된 도시가 아닌, 박해와 종교전쟁의 위험이 몰아치던 프랑스 땅이었습니다. 안전한 스위스에 머무는 대신 종교적 긴장이 극심했던 프랑스 남부의 위그노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1571년, 비레는 예순의 나이에 프랑스 남부 오르테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에 묻혔고, 파렐은 스위스 뇌샤텔에 남았으며, 베자는 칼빈의 뒤를 이어 제네바의 지도자로 삶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비레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 프랑스 남쪽으로 내려갔고, 끝내 그들 곁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역사는 대개 가장 방대한 책을 쓴 사람, 가장 강력한 제도를 구축한 사람, 승리자와 그 후계자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도 반드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기록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평생 섬긴 교회에서 쫓겨나고, 오랜 동역자와 멀어지며, 역사의 중심부에서 점차 밀려났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갔던 사람.  


어쩌면 종교개혁은 위대한 신학서적이나 유력한 이름들만으로 완성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비레가 23년간 설교했던 로잔의 높은 언덕 위 성당을 내려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는 칼빈의 이름을 더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 역사를 실제로 견뎌내야 했던 사람들 곁에는 비레가 있지 않았나? 그 빛나는 이름들 뒤에 숨겨진 이 개혁자가 내게는 더 가깝게 다가온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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