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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일기] 스위스 종교개혁 교회 답사기 1 - 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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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9-10 | 조회조회수 : 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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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5일, 마침 저는 신칼빈주의 학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어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 도착했습니다.


바젤에 도착해서 받은 첫인상은 의외로 조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취리히처럼 분주하지도 않고, 제네바처럼 국제도시의 분위기가 강하지도 않습니다. 화려한 관광도시라는 느낌도 별로 없습니다. 매일 트램이 천천히 시내를 오가고, 오래된 건물 사이로 바젤 사람들이 조용히 걸어다닙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바젤대학교를 거쳐간 인물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젤대학교는 1460년에 설립된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한 세대 전부터 이곳에서는 신학과 철학, 법학과 의학이 깊이 있게 연구되고 있었습니다.


1516년 에라스뮈스가 이 도시에서 연구하며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하고 라틴어로 번역 출간했고, 1523년부터는 외콜람파디우스가 인문주의 학자이자 목사로서 이곳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1536년, 젊은 칼뱅이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피신했을 때 저 유명한 『기독교 강요』 초판을 이곳에서 완성하여 출판했습니다. 한참 뒤인 1869년에는 니체가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바젤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고,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나치에게 쫓겨난 뒤 1935년부터 이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이 작은 도시 바젤은 생각할수록 참 대단한 곳입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이 작은 도시에 모여 성경을 읽고, 고전을 읽고, 철학을 논하며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바젤의 오래된 골목을 걷고 있으면, 천년 가까이 축적된 유럽의 지성이 건물과 돌바닥 사이 어딘가에서 아직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시끄럽게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데도 묵직합니다. 바젤은 그런 도시였습니다.


바젤 구시가를 걷다 보면 라인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두 개의 첨탑, 바젤 대성당(Basler Münster)이 나타납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대학자요 개혁자였던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가 섬겼던 교회입니다.


그는 독일 남부 태생으로 본명은 요하네스 호이스겐(Johannes Heussgen)이었습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의 유행을 따라 자신의 성을 그리스어로 바꾸었는데, 그것이 바로 '집의 등불(Lamp of the House)'이라는 뜻의 외콜람파디우스였습니다.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출신의 대학자였습니다.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교부학에도 밝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와 교제하며 성서 연구와 출판 작업에도 함께 참여했던 특급 성서학자였습니다. 개혁파 종교개혁사 전문가인 리처드 멀러 교수는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에 에라스뮈스가 있었다면 개혁파에는 외콜람파디우스가 있었다"며, 당시 개신교 진영에서 그 누구도 그의 학문성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평했습니다.


그 역시 처음부터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고 나온 혁명가는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원문으로 읽고 교부 문헌들을 읽다 보니 자꾸 이상한 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렇지 않았는데.'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


어쩌면 개혁은 그렇게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뒤엎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보다, 오래 들여다보다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된 사람에 의해 말입니다. 결국 바젤대학교에서 성경과 교부를 가르치던 외콜람파디우스는 바젤 대성당의 설교자가 되어 종교개혁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1529년, 바젤은 개혁파 도시가 되었습니다. 미사가 폐지되고 성상과 제단이 철거되었습니다. 중세 가톨릭의 주교좌성당이었던 이 거대한 대성당(뮌스터)도 개혁파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교회는 개신교 개혁교회(Evangelisch-reformierte Kirche)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 안을 둘러보다가 안쪽에서 뜻밖의 비석을 발견했는데,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ERASMUS. 잠시 멈춰 섰습니다. 에라스뮈스의 묘비가 여기에 있다고? 붉은 사암에 라틴어가 빼곡하게 새겨진 그의 묘비였습니다.


바젤은 유럽 최고의 인쇄·출판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에라스뮈스는 이곳에서 유명한 출판업자 요한 프로벤과 함께 작업했고, 1516년에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은 유럽 지성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으며, 성경을 원문대로 읽기 시작한 사람들로 인해 종교개혁의 방법론적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패와 무지를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했던 그였음에도 교회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루터처럼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할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 외콜람파디우스가 교회 개혁가로 앞장섰고, 1529년 바젤이 개혁교회의 도시가 되자 에라스뮈스는 결국 바젤을 떠나 프라이부르크로 옮겨갔습니다.


친구 외콜람파디우스와의 결별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젤이라는 도시와는 끝내 결별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7년 뒤인 1536년, 에라스뮈스는 다시 바젤로 돌아왔습니다. 1531년 외콜람파디우스가(츠빙글리가 전사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리고 에라스뮈스는 동료였던 외콜람파디우스와 친구 츠빙글리 보다 5년 뒤인 1536년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놀랍게도 종교개혁에 끝내 합류하지 않았던 에라스뮈스가 잠들어 있는 곳이 바로 외콜람파디우스가 개혁한 이 바젤 개신교 개혁교회 안입니다.


묘비 앞에 서 있으니, 지나고 보면 역사는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라스뮈스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해 1536년, 스물여섯 살의 요한 칼뱅이 바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외콜람파디우스는 1531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몇 년 뒤 프랑스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쳐 온 스물여섯 청년 칼뱅이 바젤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는 바젤에 머물며 작은 책 한 권을 완성했습니다.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기독교 강요』 초판이었습니다.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된 이 책은 젊은 인문주의자 칼뱅을 단숨에 베스트셀러 저자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박해받는 프랑스 개신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망명객 청년이 쓴 이 책이 훗날 스위스, 나아가 전 세계 개혁파 신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바젤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라스뮈스가 성경 원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었고, 외콜람파디우스는 그 성경을 들고 바젤의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지적·교회적 유산 속으로 젊은 칼뱅이 들어와 『기독교 강요』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바젤이라는 도시 안에서 이 세 사람의 서사가 경이롭게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라스뮈스의 묘비, 외콜람파디우스의 흔적, 그리고 칼뱅의 『기독교 강요』 초판. 이 모든 유산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답사의 깊은 묘미를 더해줍니다.


교회 뒤뜰 전망대로 나가자 시야가 탁 트이며 발아래로 라인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그곳에 서서 강물 조용히 내려다보았습니다.


500년 전에도 이 강은 이렇게 흘렀을 것입니다. 외콜람파디우스도 주일 설교를 마치고 뒤뜰로 나와 이 강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에라스뮈스도 집필하던 책을 잠시 내려놓고 이 강가를 걸었을 것입니다. 조용한 도시 바젤에 몸을 숨기고 『기독교 강요』를 쓰던 젊은 칼뱅 역시 언덕 위에서 이 강물을 바라보았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이 라인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인물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고, 그들이 던졌던 본질적인 질문 역시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가?

그리고 개혁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500년 전에는 미사와 성상, 교황의 권위에 맞서 성경을 붙들고 싸웠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다시 성경 앞에 서서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라인강을 한참 바라보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외콜람파디우스가 개혁했던 뮌스터 대성당의 두 첨탑이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500년의 세월 동안 건물로서의 교회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성경과 역사의 현장에 모여앉아 천진난만하게 떠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젤 인구 중 개신교 개혁교인은 10%에 불과하고 60% 이상이 무신론자라는 최근의 통계가 머리를 스쳤습니다.


마음속에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교회 건물은 이렇게 남아 있는데, 종교개혁의 정신도 함께 남아 있는가?' 그 질문 하나를 깊이 품은 채 바젤 뮌스터의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종교개혁의 흔적을 찾아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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