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19. 뼈만 남은 청새치와 성장을 향한 갈망 > 칼럼 | KCMUSA

[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19. 뼈만 남은 청새치와 성장을 향한 갈망 > 칼럼

본문 바로가기

칼럼

홈 > 목회 > 칼럼

[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19. 뼈만 남은 청새치와 성장을 향한 갈망

페이지 정보

작성자 | 작성일2026-07-30 | 조회조회수 : 4회

본문

산티아고는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를 잡았습니다. 84일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늙은 어부에게 그것은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기술과 인내, 고독과 집념, 오래된 손의 기억이 모두 그 거대한 청새치에 담겨 있었습니다. 작은 배 옆에 묶인 거대한 청새치는 산티아고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보였습니다. 늙은 어부의 삶에 다시 한번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귀항입니다. 그러나 귀항의 길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몰려왔습니다. 산티아고는 전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작살로, 칼로, 노로, 남은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상어들은 청새치의 살을 뜯어먹었습니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의 눈앞에 남은 것은 거대한 청새치가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청새치의 뼈뿐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청새치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손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노인의 빈손, 그리고 뼈만 남은 청새치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성취가 유지되지 않을 때, 그 성취는 실패입니까? 열매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 항해는 헛된 것입니까? 결과가 사라진 뒤에도 소명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까? 산티아고의 이야기는 이 질문을 쉽게 닫지 않습니다. 그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항해가 헛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결과로 말합니다. 얼마나 큰 고기를 잡았는가, 얼마나 많이 남겼는가, 얼마에 팔 수 있는가, 얼마나 인정받았는가를 묻습니다. 숫자는 분명합니다. 크기는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성과는 쉽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공을 “남은 살점의 양”으로 판단합니다. 무엇을 얻었는가, 무엇이 남았는가, 얼마나 보이는가가 성공의 기준이 됩니다.


교회도 이 숫자의 언어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몇 명이 모이는가, 몇 명이 등록했는가, 몇 개의 교회를 개척했는가, 몇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가, 예산이 얼마나 늘었는가, 건물이 얼마나 커졌는가를 묻습니다. 물론 이런 질문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사역자는 무책임하게 일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전도의 열매를 기뻐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야 하며, 선교 사역의 열매를 정직하게 살펴야 합니다. 열매를 무시하는 것은 영성이 아니라 때로 무관심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숫자가 교회의 영혼을 지배하기 시작할 때 생깁니다. 숫자가 하나님 나라를 대신할 때, 교회는 위험에 빠집니다. 통계가 성령의 자리를 차지하고, 성장 그래프가 십자가의 길을 대체하며, 사람을 향한 사랑보다 성과 보고서가 앞서게 될 때,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가 아니라 종교적 성공주의의 기관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성장학의 아버지 도널드 맥가브란은 개종 성장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숫자 그 자체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 참된 제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찰스 밴 엥겐의 참된 교회 성장에 대한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선교신학적 통찰을 줍니다. 밴 엥겐은 수적 성장을 향한 갈망이 참된 교회의 표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된 교회는 잃어버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기를 갈망합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더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선교적 갈망이 없다면 교회는 자기 보존의 공동체로 굳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밴 엥겐은 실제 수적 성장의 양 자체를 교회의 본질을 판정하는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실제 성장의 양은 성령의 역사이며, 동시에 여러 상황적 변수와 역사적 조건 속에서 나타납니다. 어떤 교회는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박해와 사회적 장벽 속에서 작은 무리로 남을 수 있습니다. 어떤 선교지는 오랜 세월 씨를 뿌렸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더디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역 교회는 충성스럽게 섬겼지만 인구 감소와 고령화, 지역 붕괴라는 현실 속에서 숫자상으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가 반드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청새치와 상어”의 선교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청새치는 사역의 열매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도 끝에 맺힌 전도의 열매, 수년간의 양육 끝에 세워진 제자, 어렵게 시작한 선교 사역, 지역 사회를 향한 섬김의 결실, 교회가 온 힘을 다해 감당한 하나님 나라의 수확입니다. 우리는 청새치를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열매는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은 감사로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열매를 사모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사람을 향한 갈망이 없는 교회는 선교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다에는 상어 떼도 있습니다. 상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시대의 변화, 사회의 불신, 문화적 저항, 경제적 위기, 공동체 내부의 갈등, 지도자의 소진, 제도의 한계, 예기치 않은 실패, 인간의 죄성이 상어처럼 달려듭니다. 교회가 얻은 열매를 위협하고, 사역의 기쁨을 갉아먹고, 수고의 결과를 훼손합니다. 때로는 교회가 분명히 청새치를 잡았는데도, 항구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뼈만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좌절합니다. “남은 것이 무엇인가?” “그토록 기도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가 한 사역이 정말 의미 있었는가?” “이 정도 결과라면 처음부터 나가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았는가?” 이 질문은 목회자의 질문이기도 하고, 선교사의 질문이기도 하며, 작은 개척 교회를 섬기는 성도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해 오래 기도했지만 눈에 보이는 변화가 더딘 부모와 교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뼈만 남은 청새치 앞에서 우리는 자기 사역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도 비슷한 밤을 보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였지만, 그들은 다시 바다로 나갔고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어부였던 그들에게 빈 그물은 단순한 직업적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능력의 한계를 확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해변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제자들이 순종했을 때, 그물에는 많은 물고기가 가득 찼습니다. 빈 그물의 밤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새벽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장면은 교회 성장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나 물고기로 채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교회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무책임하게 손을 놓아서도 안 되고, 자기 힘으로 성장을 조작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충성은 우리의 몫이고,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 원리를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무책임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충성을 요구합니다. 심지 않는 사람이 추수를 말할 수 없습니다. 물 주지 않는 사람이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심고 물을 준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성장의 최종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씨는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떨기에도, 좋은 땅에도 떨어집니다. 모든 씨가 같은 결과를 맺지는 않습니다. 어떤 씨는 새들이 먹어 버리고, 어떤 씨는 뿌리가 없어 말라 버리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에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자의 충성입니다. 그는 계산 가능한 땅에만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씨를 곳곳에 넉넉히 뿌립니다.


이것이 선교적 교회의 자세입니다. 교회는 결과를 조작하지 않습니다. 열매를 과장하지 않습니다. 통계를 우상화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열매에 무관심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교회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갈망합니다.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합니다. 세례의 물이 흐르고, 성찬의 식탁이 넓어지고,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고, 다음 세대가 주님을 만나고, 열방이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갈망은 세속적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거룩한 열망입니다.


그러나 그 갈망은 십자가의 길 위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 성장의 갈망이 십자가를 떠나면 그것은 성공주의가 됩니다.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갈망이 아니라 더 큰 조직을 만들기 위한 욕망이 됩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는 열정이 아니라 경쟁 교회보다 앞서려는 비교심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도가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남기려는 건축 계획이 됩니다. 성장을 향한 갈망은 반드시 십자가 앞에서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뼈만 남은 청새치는 우리에 경고와 위로를 동시에 줍니다. 먼저 경고는 이것입니다. 청새치의 크기만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 사역, 큰 집회, 큰 건물, 큰 숫자, 큰 프로그램이 반드시 참된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상어가 오기 전의 청새치만 보고 승리의 나팔을 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취 뒤에 숨어 있는 영적 상태를 물어야 합니다. 그 성취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는가? 그 성장은 제자도를 낳고 있는가? 그 숫자는 사랑과 거룩과 증언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동시에 뼈만 남은 청새치는 위로를 줍니다. 뼈만 남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산티아고의 배에 남은 것은 고기 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뼈는 노인의 바다 이야기를 증언합니다. 거대한 청새치와의 싸움이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항해가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노인이 깊은 바다로 나갔고, 자기 직업적 소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붙들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뼈는 실패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사투의 증거였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사역의 살점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애써 키워 놓은 프로그램이 중단될 수 있습니다. 오래 동역했던 사람이 떠날 수 있습니다. 선교 프로젝트가 기대만큼 열매 맺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역 사회를 섬겼지만 감사보다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했지만 결과가 더디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항구에서 뼈만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바다에서 흘린 기도와 눈물, 순종과 인내를 보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 드려진 수고는 단지 통계로만 평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열매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충성을 기억하십니다. 교회는 열매를 갈망하되, 열매의 양으로만 자기 정체성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향해 성장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열매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된 교회 성장은 결과의 양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갈망에서 먼저 드러납니다. 물론 그 갈망은 실제 순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가 “우리는 숫자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핑계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마음이 없는 교회가 “성장은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무관심일 수 있습니다. 밴 엥겐의 통찰은 수적 성장에 대한 갈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갈망을 회복하되, 성장의 양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지적입니다.


교회는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갈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매의 최종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깊은 겸손입니다. 갈망 없는 겸손은 쉽게 무기력이 됩니다. 겸손 없는 갈망은 쉽게 성공주의가 됩니다. 참된 선교적 교회는 갈망과 겸손을 함께 품습니다. 주님의 명령 때문에 그물을 던지고, 주님의 주권 때문에 결과 앞에서 겸손합니다.


오늘 우리는 뼈만 남은 청새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과거의 부흥은 기억 속에 있고, 현재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한때 풍성해 보였던 열매가 줄어들고,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약해졌으며, 다음 세대는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상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빼앗긴 듯 느낍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참된 교회 성장을 다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성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성장을 원합니까? 우리의 갈망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이름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잃어버린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수적 성장을 갈망합니까, 아니면 우리 교회의 안전을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합니까? 이 질문 앞에서 교회 성장의 언어는 정화되어야 합니다. 성장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정화되지 않은 성장 욕망이 문제입니다. 숫자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숫자가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차지할 때 문제가 됩니다.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빈 그물을 든 제자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조반을 차려 주셨고, 그들을 회복시키셨으며, 다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실패의 밤을 보낸 제자들에게 주님은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그물을 던지게 하셨습니다. 다시 먹이게 하셨습니다. 다시 따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사명의 바다로 보내십니다.


뼈만 남은 청새치 앞에서 교회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자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열매를 갈망하십시오. 그러나 열매를 우상화하지 마십시오. 그물을 던지십시오. 그러나 그물을 채우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씨를 뿌리십시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십시오. 산티아고의 뼈만 남은 청새치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보이는 결과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깊은 바다로 나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뼈조차 남지 않는다. 교회여, 다시 바다로 나아가십시오. 갈망을 품고, 겸손을 입고, 주님이 명하시는 곳에 다시 그물을 던지십시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76b306ccfc634f1d4695872571f1a584_1785450309_3001.png
 
  •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

KCMUSA,680 Wilshire Pl. #401, Los Angeles,CA 90005
Tel. 213.365.9188 E-mail: kcmusa@kcmusa.org
Copyright ⓒ 2003-2020 KCMUSA.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