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18. 노인의 손과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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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말합니다. 산티아고의 손은 거칠어졌습니다. 젊은 날처럼 민첩하지도 않고, 힘이 넘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손은 여전히 바다를 압니다. 낚싯줄의 긴장, 물결의 방향, 고기의 움직임, 밤바다의 침묵을 압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의 손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닙니다. 그 손은 그의 인생 자체입니다. 오랜 노동의 기억이고, 실패의 흔적이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간 존엄의 상징입니다.
산티아고는 승리한 영웅도 아니고, 단순한 패배자도 아닙니다. 그는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불운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의 배는 작고, 몸은 지쳤으며, 그의 삶에는 화려한 성취보다 침묵과 고독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바다로 나갑니다. 그리고 깊은 물에서 거대한 청새치와 씨름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손은 낚싯줄에 찢기고 피를 흘립니다.
산티아고의 손, 그 찢긴 손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인간의 약함은 실패의 증거일 뿐입니까? 상처는 패배의 흔적일 뿐입니까? 아니면 약함과 상처 속에서도 어떤 깊은 증언이 가능합니까? 노인의 손에는 수많은 바다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손은 말없이 증언합니다. 인간은 약하다. 그러나 약한 인간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은 상처 입는다. 그러나 상처 입은 인간도 자기 소명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쉽습니다. 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자랑할 만한 재료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질그릇 안에 복음의 보배를 담으십니다.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습니다. 버림받지 않습니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약한 몸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선교적 증언은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손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완벽한 교회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흠 없는 사람, 실패 없는 공동체, 상처 없는 지도자만을 통해 일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때때로 찢긴 손, 지친 몸, 오래 견딘 마음, 실패를 통과한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복음은 인간의 강함을 전시하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자기 상처를 자랑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내세우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자기 아픔을 명분 삼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자기 희생을 앞세워 권위를 요구하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상처가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상처 입으신 그리스도만이 복음입니다. 교회는 자기 상처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이 진리를 깊이 보여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도마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부활은 상처의 삭제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더 이상 패배의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흔적, 구원의 흔적, 화해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산티아고의 손은 자기 생존을 위한 사투의 흔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손은 타자를 살리기 위해 찢기신 구원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산티아고를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알레고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산티아고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는 인간입니다. 약하고, 고독하며, 끝까지 버티려는 인간입니다. 바로 그 인간의 한계와 존엄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은 복음의 질문 앞에 섭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찾아오시는가?
찰스 밴 엥겐은 지역 교회를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 보았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물러나 자기 안에 머무는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그는 지역 교회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며 네 가지 차원을 중요하게 제시합니다. 코이노니아, 사랑의 사귐. 케리그마,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선포. 디아코니아,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섬김.말투리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 선교는 이 네 요소가 지역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구체적인 몸을 입습니다.
이 네 단어로 산티아고의 손을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선교신학적으로 읽을 때, 노인의 손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교회의 손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먼저, 노인의 손은 코이노니아의 손입니다. 산티아고는 혼자 바다에 있지만 완전히 고립된 인간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마놀린이 있습니다. 소년과 노인의 관계는 세대 간 사랑과 신뢰를 보여 줍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상처 입은 교회가 회복되는 첫 자리는 사랑의 사귐입니다. 서로의 손을 붙드는 공동체, 지친 사람을 버리지 않는 공동체, 실패한 사람 곁에 머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코이노니아 없는 선교는 쉽게 프로그램이 됩니다. 사랑 없는 증언은 소음이 됩니다.
둘째, 노인의 손은 케리그마의 손을 생각하게 합니다. 케리그마는 단지 말의 선포만이 아닙니다. 물론 복음은 분명히 말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며, 십자가와 부활 안에 구원이 있다는 복음은 교회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선포는 삶의 진실성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찢긴 손으로 다시 그물을 붙드는 사람의 삶에는 말 이전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할 때, 그 말은 상처 입은 세상 앞에서 겸손한 삶과 함께 들려야 합니다. 복음의 말은 복음의 몸을 필요로 합니다.
셋째, 노인의 손은 디아코니아의 손입니다. 손은 섬김의 기관입니다. 손은 밥을 짓고, 그물을 고치고, 상처를 싸매고, 누군가를 일으켜 세웁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증언한다는 것은 강단의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웃의 식탁에 다가가는 손, 병든 사람의 곁을 지키는 손, 이주민과 난민을 환대하는 손, 외로운 노인을 붙드는 손, 다음 세대를 축복하는 손이 필요합니다. 디아코니아는 복음의 장식이 아닙니다. 복음의 몸짓입니다.
넷째, 노인의 손은 말투리아의 손입니다. 말투리아는 순교적 증언입니다. 증언은 자신을 높이는 말이 아닙니다. 증언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의 약함 속에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한 증언 공동체가 될 때, 약함은 더 이상 부끄러움만이 아닙니다. 실패는 더 이상 감추어야 할 과거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약함은 복음이 머무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은 교회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투리아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분노만 전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정죄만 반복하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초청하는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교회의 손은 밀어내는 손이 아니라 초대하는 손이어야 합니다. 상처 주는 손이 아니라 화해를 향해 내미는 손이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다시 자기 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은 무엇을 해 왔습니까? 어떤 손은 평생 교회를 섬기느라 거칠어졌습니다. 어떤 손은 선교지에서 낯선 언어와 문화를 견디며 닳았습니다. 어떤 손은 병든 성도를 붙들다 지쳤습니다. 어떤 손은 새벽마다 강단을 붙들고 기도하다 늙었습니다. 어떤 손은 다음 세대를 위해 수십 년 동안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헌신했습니다. 이 손들은 귀합니다. 하나님은 그 손의 숨은 수고를 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의 손이 언제나 치유의 손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 교회의 손은 누군가를 밀어냈습니다. 때로 권위의 이름으로 상처를 주었습니다. 때로 자기 의를 붙들었고, 때로 약한 자를 충분히 품지 못했습니다. 선교적 증언 공동체는 자기 손의 수고만 말하지 않고, 자기 손의 허물도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참된 말투리아는 자랑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상처 입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교회는 먼저 자기 손의 상처와 허물을 그리스도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오늘 많은 교회가 늙어가고 있습니다. 오래된 교회는 활력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목회자는 지쳤고, 선교사는 외롭고, 지도자들은 실패의 기억을 안고 살아갑니다. 다음 세대는 교회를 낯설게 느끼고, 세상은 교회의 말을 쉽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무엇이 남아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산티아고의 찢긴 손은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손이 늙었다고 해서 소명이 끝난 것입니까? 상처가 있다고 해서 증언이 불가능한 것입니까?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서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질그릇 안에도 보배가 있습니다. 찢긴 손도 주님께 드려질 수 있습니다. 지친 교회도 다시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교회도 새롭게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자기 상처에 갇히느냐, 아니면 그 상처를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 내어놓느냐입니다. 자기 연민은 공동체를 좁게 만들지만, 은혜의 증언은 공동체를 다시 세상으로 보냅니다. 상처만 바라보면 교회는 과거에 갇힙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주님의 손에 맡기면, 교회는 다시 화목의 사명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약함은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릴 때, 약함은 증언의 자리가 됩니다.
노인의 손은 바다에서 찢겼습니다. 그러나 그 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손도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상처 입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오해받고, 섬기다 지치고, 사랑하다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손이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릴 때, 약함은 실패의 마지막 이름이 아니라 은혜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교회는 강하기 때문에 증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붙들렸기 때문에 증언합니다.
교회는 완전하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화목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세상으로 보냄 받습니다. 우리의 찢긴 손이 주님의 못 박힌 손을 가리킬 때, 그 손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손이 됩니다. 산티아고의 손은 인간의 존엄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손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교회는 자신의 손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손으로 주님의 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세상을 섬깁니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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