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14. 우울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인간: 산티아고, 헤밍웨이, 그리고 복음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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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는 바다 위에서 혼자 말합니다. 그 말은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바다는 대답하지 않고, 청새치도 인간의 언어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계속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바다에게, 새에게, 물고기에게 말을 겁니다. 그 독백은 늙은 어부의 습관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으면 무너지는 자아를 붙들기 위한 인간의 마지막 언어처럼 들립니다. 깊은 고독 속에서 인간은 때로 자기 목소리로 자기 영혼을 붙듭니다. 독백은 바다의 언어입니다.
문영수 교수의 「문학과 우울증에 관한 연구: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이 지점을 예민하게 읽어 냅니다. 이 연구는 『노인과 바다』를 단순한 영웅 서사나 노년의 승리담으로만 읽지 않고, 헤밍웨이의 삶에 나타난 우울의 징후가 산티아고의 말과 행동, 일상, 자연 묘사 속에 어떻게 스며 있는지를 살핍니다. 이러한 독해는 산티아고를 “불굴의 인간”으로만 보지 않게 합니다. 그는 깊은 우울과 고독 속에서 자기 존재를 가까스로 지탱하는 인간으로도 보입니다.
『노인과 바다』는 자주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 문장만 붙들면 산티아고의 고통을 너무 빨리 영웅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는 강합니다. 그러나 아픕니다. 그는 견딥니다. 그러나 고독합니다. 그는 패배하지 않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이 둘을 함께 보는 것이 문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더 정직한 독해입니다. 인간은 존엄하지만 연약하고, 견딜 수 있지만 동시에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복음주의 신앙은 죄의 실재를 말하지만, 모든 고통을 개인의 특정한 죄로 단순 환원하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을 너무 빨리 해석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단순한 해석을 책망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승리 이후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 영혼을 향해 “어찌하여 낙심하느냐”고 탄식했습니다. 성경은 절망의 언어를 숨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고통을 부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산티아고의 독백은 이 지점에서 신학적으로 다시 들립니다. 그는 바다 위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며 버팁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독백을 기도로 바꾸어 줍니다. 혼잣말은 자기 자신을 붙들기 위한 언어일 수 있지만, 기도는 하나님께 붙들리는 언어입니다. 산티아고가 자기 의지의 마지막 불꽃으로 바다를 견딘다면,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바다 위에서 자기 힘이 다한 뒤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탄식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강한 사람의 선언만이 아닙니다. 무너지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대어 내쉬는 숨이기도 합니다.
헤밍웨이의 산티아고는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인간 정신의 비장한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앙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인간은 파멸 앞에서 품위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품위가 곧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 의지의 극한에서 오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에서 옵니다. 산티아고가 뼈만 남은 청새치를 끌고 돌아왔다면, 그리스도는 죽음을 지나 빈 무덤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산티아고의 이야기가 인간 인내의 극한을 보여 준다면, 복음은 인간 인내가 다한 자리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 줍니다.
이 작품에서 산티아고의 고독을 완전히 어둡게 만들지 않는 인물이 있습니다. 소년 마놀린입니다. 마놀린은 노인을 기억합니다. 돌봅니다. 다시 바다로 나갈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는 작품 안에서 작은 은혜의 흔적처럼 존재합니다. 마놀린은 노인의 상처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곁에 있습니다. 이것이 깊은 위로입니다. 우울과 고독의 바다를 지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 많은 말이 아니라, 떠나지 않는 한 사람의 조용한 곁입니다.
문영수 교수의 연구가 유익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노인과 바다』를 영웅주의 서사로만 보지 않고, 우울의 그림자 속에서도 읽게 합니다. 산티아고는 용기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소진의 인물입니다. 그는 존엄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간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은 이 둘을 함께 봅니다. 인간의 존엄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이름으로 고통을 숨기게 하지 않고, 은혜의 이름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돌봅니다.
교회는 우울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괜찮아야 한다”는 말로 상처 입은 사람을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됩니다. 우울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과 관계와 기억이 함께 흔들리는 깊은 고통일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상담과 치료를 대신하는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일하시며, 때로 의사와 상담자와 친구와 공동체의 손길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결국 산티아고의 바다는 인간 실존의 바다입니다. 그 바다에는 고독이 있고, 싸움이 있고, 상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눈으로 그 바다를 다시 보면, 그 위에는 또 하나의 배가 떠 있습니다. 풍랑 가운데 제자들과 함께하신 그리스도의 배입니다. 주님은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산티아고의 독백이 깊은 밤의 언어라면, 복음은 그 밤을 지나 새벽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바다는 깊습니다. 우울의 바다는 더욱 깊습니다. 그 바다에서는 자기 자신도 낯설어지고, 어제까지 붙들었던 소망도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깊은 바다 위에서도 우리를 보십니다. 주님은 풍랑 밖에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풍랑 속으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울의 바다를 지나는 사람은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필요한 전문적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부족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용기입니다.
산티아고는 바다 위에서 혼자 말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독백을 기도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 힘이 다했습니다. 나를 붙들어 주소서.” 그 기도는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짧아도 됩니다. 눈물뿐이어도 됩니다. 하나님은 상한 마음 가까이에 계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바다는 깊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때로 마놀린 같은 사람의 얼굴로, 조용한 동행으로, 치료의 손길로, 다시 살아 보라는 작은 새벽의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정오의 태양으로 다가옵니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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