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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프로이트의 모세론과 출애굽 연대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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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6-26 | 조회조회수 : 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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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생애 마지막 해에 저술한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1939)를 읽었습니다. 계시종교의 전통을 따르는 저에게는 매우 도전적인 책이었습니다. 특히 프로이트는 유일신교의 기원을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모세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는 모세의 유일신 사상이 히브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 아크나톤(재위 기원전 1353~1336년)이 추진했던 태양신 ‘아톤(Aten)’ 숭배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왕조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집트 귀족 출신인 모세가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탈출하면서 아톤 신앙을 전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연대기나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하기보다 이집트의 정치·종교사를 중심으로 출애굽을 재구성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류 성서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프로이트는 출애굽을 기원전 14세기 중반, 곧 기원전 1350년경으로 보았습니다. 더욱이 그는 모세가 광야에서 자신이 인도한 히브리인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이 집단적 ‘아버지 살해’의 죄책감이 훗날 미디안 지역에서 알려진 야훼 신앙과 결합하면서 히브리 유일신교의 핵심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십여 년 전 이집트와 수단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주일 동안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나일강 중류에 위치한 룩소르를 방문하는 귀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웅장한 카르낙 신전과 왕릉의 계곡을 둘러본 뒤, 핫셉수트 여왕(재위 기원전 1479~1458년)의 장제전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관광 안내원은 핫셉수트가 ‘모세의 양어머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장제전과 주변 유적을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핫셉수트는 투트모스 2세의 왕비였으며, 남편이 죽은 뒤 어린 후계자 투트모스 3세의 섭정을 맡다가 결국 자신이 파라오로 즉위하여 통치했습니다. 장제전의 기둥에는 남성 파라오의 모습으로 표현된 여왕의 조각상이 남아 있었는데, 파괴되기 전까지 부착되어 있었던 의식용 수염과 왕권을 상징하는 코브라 장식의 흔적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핫셉수트가 사망한 뒤 투트모스 3세가 단독 통치를 시작하면서 그녀의 장제전과 조각상, 벽화는 조직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안내원의 설명은 의도치 않게 출애굽의 전통적인 연대를 뒷받침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모세가 “바로의 딸의 양아들”이었다면(출 2장), 그는 제18왕조 시대의 인물이 됩니다. 이는 출애굽 연대를 기원전 1446년경으로 보는 이른바 ‘15세기 전기설’과 잘 부합합니다.

   

이 견해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열왕기상 6장 1절입니다. 이 본문은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가 출애굽 후 480년째라고 기록합니다. 일반적으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기원전 966년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역산하면 출애굽은 대략 기원전 1446년경이 됩니다. 또한 사사기 11장 26절에서 입다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주한 지 300년이 되었다고 말한 것도, 약 350년으로 추정되는 사사 시대와 연결될 때 15세기 전통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제시됩니다.

   

반면 전통적인 연대를 비판하며 역사학과 고고학의 증거를 더욱 중시하는 학자들은 이른바 ‘출애굽 후기설’을 제안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등장하는 '라암셋'이라는 지명에 주목합니다. 이를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이 제19왕조 람세스 2세(재위 기원전 1279~1213년) 시대에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으며, 이후 출애굽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출애굽 시기를 기원전 13세기 중반, 곧 기원전 1250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이집트 왕자』(1998)와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 역시 이러한 후기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15세기 전기설’과 ‘13세기 후기설’은 오늘날 성서학에서 가장 널리 논의되는 두 가지 경쟁적 패러다임입니다. 반면 프로이트가 제안한 14세기 중반 설은 신학계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설이 성경의 증언은 물론 역사학과 고고학의 자료와도 충분히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는 생애 마지막 저작에서 자신을 ‘신 없는 유대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종교를 인간 심리와 사회적 기억이 만들어 낸 산물로 이해했으며, 계시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정신분석학이라는 인간학으로 환원하려 했습니다. 폴 리쾨르는 이러한 프로이트를 마르크스와 니체와 함께 “의심의 대가(masters of suspicion)”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며, 그의 해석학이 인간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리쾨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심과 해체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텍스트가 증언하는 진리를 다시 발견하려는 ‘신뢰의 해석학’을 제안했습니다. 프로이트의 문제 제기는 종교를 새롭게 성찰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도전이었지만, 계시 자체를 인간 심리로 환원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신학과 철학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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