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시간의 폭정을 극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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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목회자로 헌신했던 20년 남짓한 세월을 돌아보면,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기도 덕분에 잘 달려올 수 있었다는 고백이 앞섭니다. 목회를 내려놓으며 깨달은 사실은, 목회자가 성도들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는 ‘능력 있는 해결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고통당하는 성도의 곁에 함께 서서 아픔과 즐거움을 나누는 ‘동반자’가 진정한 목회자의 모습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이시기에, 목회자는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족할 것입니다.
목회 여정에서 얻은 또 다른 교훈은 “시간을 이길 장사가 없다”는 준엄한 한계 의식입니다. 그동안 참으로 귀한 성도들을 많이 떠나보냈습니다. 부모님 같은 어르신들, 형님과 누님 같던 선배들, 그리고 제자와 후배, 청년들을 먼저 보내며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번 주간에도 신앙의 여정을 함께했던 성도와 장로님 가족의 장례에 두 번이나 참석해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는 우리네 삶은, 시간의 위력 앞에 선 인간의 유한함을 뼈아프게 자각하게 합니다.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저서 『시간의 폭정』(The Tyranny of Time)에서 시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독재자가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굴레가 되자, 테크놀로지와 문명을 발전시킨 현대인은 역설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시간에 쫓기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이제 폭군이 되어 우리의 삶을 압제합니다. 이에 대해 뱅크스는 “대가를 지불하고 시간을 사야(redeem) 한다”고 강조합니다. 의미 없이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를 가치 있는 역사적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로 바꾸어 확보하라는 뜻입니다. 일상의 치열함에 밀려 묵상과 성찰, 휴식과 사랑이 없는 삶에 휘둘릴 때, 우리의 시간은 자칫 악한 영의 소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redeem) 때가 악하니라”(엡 5:16)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간의 폭정을 막기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안식일의 기원은 창조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제7일을 안식일로 정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시간의 연속선상에 개입한 ‘거룩한 불연속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쉼과 휴식, 놓임과 회복을 통해 부지런히 살아온 6일의 삶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완성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헤셀(Abraham Heschel)은 이 안식일을 가리켜 “시간 속의 궁전”, “시간 속의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기 전, 이미 문명과 문화를 넘어선 자리에 ‘시간의 성소’를 먼저 지으셨습니다. 그날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과의 궁극적인 만남을 연습하도록 시간 속에 예비된 찬란한 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최초의 거룩함을 바로 ‘시간’ 속에 배치하셨습니다. 창조의 일곱째 날부터 지금까지 안식일의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서 시작된 거룩함은 안식월, 안식년, 그리고 50년째의 희년으로 확장되며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에서 시작된 거룩함을 통해 그 시간에 참여하는 성도를 거룩하게 하셨고, 나아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 또한 거룩한 곳으로 만드셨습니다. 헤셀의 통찰처럼, 거룩함의 순서는 첫째가 시간이고, 둘째가 인간이며, 마지막이 공간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이라면 마땅히 먼저 ‘시간을 사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이미 세상의 가치들에 점거당했기에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만 되찾을 수 있습니다.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가치 있는 사명을 위하여, 잃어버린 추억을 되찾기 위하여 우리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친 몸을 회복하며, 깨어진 관계를 잇고 삶의 서사를 회복하기 위해 때로는 안식년과 희년을 선포하며 시간의 독재를 청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거룩한 시간을 구매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목사,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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