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골프 캐디와 신앙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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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메이저리그에서 쇼헤이 오타니는 자신의 이름을 등에 달고 지난해 또 한 번 MVP가 되었다. 프리미어리그와 월드컵 무대에서 손흥민은 ‘SON’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가 알아보게 만들었다. NBA의 르브론 제임스 역시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타이거 우즈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현대 스포츠는 이름을 드러내는 시대다. 이름이 곧 정체성이고, 시장 가치이며, 영향력이다. 그런 흐름에서 유독 비켜서 있는 종목이 있다. 바로 골프다.
2026년 골프(PGA) 시즌이 하와이에서 개막되었다. 매년 처음 열리는 ‘소니 오픈’에서 미국의 크리스 카터랍 선수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골프 시즌이 시작되면 나는 종종 골프 채널 앞에 죽치고 앉아 있게 된다. 로리 맥길로이나 스카티 쉐플러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모습이 못 마땅한 지, 아내는 TV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대장암에 걸린다고 협박하곤 한다. 너무 TV에 매달리지 말라는 충고겠지만 그냥 공갈 협박 쯤으로 뭉개고 오늘도 골프 채널을 켠다.
다 아시다시피 골프 선수들은 등에 이름을 달지 않는다. 대신 캐디가 선수의 이름을 달고 코스를 함께 걷는다. 이 기묘한 장면은 단순한 전통을 넘어, 깊은 상징성을 품고 있다.
골프에서 캐디는 분명 조연이다. 샷을 치지 않고, 스코어카드에 이름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선수의 이름을 가장 크게 드러내며 걷는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이 사람이 주연이다.” 캐디의 등에 적힌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선수의 이름이다.
캐디의 존재 이유는 자신을 알리는 데 있지 않고, 주연을 돋보이게 하는 데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연의 태도가 골프라는 스포츠의 품위를 지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골프를 ‘신사의 스포츠’라고 말한다. 골프 선수는 이름을 달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의 플레이에 책임을 진다. 심판이 없는 유일한 스포츠다. 심판이 없어도 스스로 벌타를 선언하고, 관중의 환호보다 매너로 평가받는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숨긴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름보다 본질이 앞선다는 선언일 것이다. 이 점에서 골프는 현대 스포츠 가운데 가장 역설적인 종목이다. 보이지 않음으로 존중받고, 드러내지 않음으로 무게를 얻는 것이다.
이 장면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주연인가, 조연인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분명하다. 주연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삶을 대신 살아내는 존재가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며 걷는 사람들이다.
세례 요한의 고백은 이를 가장 명확히 말해 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 요한은 주연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기꺼이 조연의 자리를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마치 골프 코스를 걷는 캐디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름을 드러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이름을 알려라.” “너 자신을 증명하라.” “너의 브랜드를 만들어라.” 그러나 신앙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의 이름을 달고 살고 있는가?” “네가 드러내는 것은 너 자신인가, 그리스도인가?”
기독교 신앙은 ‘나를 없애라’는 금욕이 아니라, ‘이름의 방향을 바꾸라’는 초대일 것이다. 나는 조연이지만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조연이기에, 주연의 영광이 선명 해 진다.
캐디는 항상 선수보다 반 걸음 뒤에서 걷는다. 그러나 길을 가장 잘 읽고, 바람을 먼저 느끼며, 클럽을 묵묵히 준비한다. 그의 역할은 눈에 띄지 않지만, 없으면 경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신앙인의 삶도 그렇다. 앞에 나서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을 등에 달고 조용히, 성실히 걷는 삶. 어쩌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깊은 존귀함은 이런 자리에서 주어질지도 모른다.
모두가 이름을 등에 달고 경쟁하는 시대에, 골프 코스 위 캐디의 모습은 묻는다.
“너는 누구의 이름을 드러내며 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연이고, 나는 그분의 이름을 드는 조연으로 살아가는 것 - 그것이야 말로 가장 자유롭고, 가장 온전한 신앙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쉬운 일인가?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고백이, 과연 내 인생 가운데 가능하기는 한 걸까? 예수 그리스도가 주연이고, 나는 그분의 이름을 드는 조연으로 살아간다는 것 -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딱 잡아 떼면서 “난 못해요”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그렇게 살아보자고 다짐은 해보자. 새해가 아닌가? 넘어 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그때마다 그분의 손은 분명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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