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사회적 인간과 이웃의 변증법
페이지 정보
본문
지난 5월 선교여행 차 고국에 왔다가, 조카의 결혼 주례를 요청받고 ‘다시 오리라’ 약속했습니다. 8월 17일 다시 들어와서는 짧은 방문 기간 중 부지런히 공적인 사적인 일을 감당하여야 했습니다. 결혼 주례는 물론이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잡힌 설교와 강의 일정을 나름 잘 감당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했습니다. 수요일 모 교회인 충현교회에서 오전 설교를 마치고는 은사 김홍우 선생님을 뵙고, 깜짝 놀랐습니다. 금요일에는 선생님과 따로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 말씀 중에 정치인이나 법조인이나 종교인이나 누구나를 막론하고 “생활”이 빠진 추상적 세계에만 매인 것이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국민의 생활이 빠진 정치, 추상화된 법 집행, 교인의 삶에 연결되지 않은 설교, 민생을 고려하지 않고 시행되는 정책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생활세계’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 설교나 법적 판단을 우려하신다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수님이 현상학적 관점을 가지신 것 같다” 말씀하셨습니다. 에드문드 후설의 초기 사상에서 경험적인 산수(arithmetic)와 추상적인 수학(mathematics)을 나누어 설명하며, 경험적 산수의 영역을 상실한 세상의 균형 상실을 애석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대학원 시절 저에게 폴 리쾨르(Paul Ricoeur)를 소개하셨습니다. 우리말로 쓴 논문 한 편이 없던 시절에 영문 서적을 어렵게 읽어가면서 겨우 파악했던 리쾨르였습니다. 『역사와 진리』라는 책에 실렸던 “사회적 인간(Socius)과 이웃(Neighbor)”이라는 논문이 생각나, 선생님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다시 저의 지난 목회를 평가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리쾨르가 말한 ‘사회적 인간’의 관계는 정의, 법, 권리의 영역에서 비인격적으로 맺는 관계를 말합니다. 경제적 거래와 교환에서, 정치 제도를 통해 숫자와 통계로 처리되는 정책에서, 그리고 종종 교회 성장과 목회 공학의 대상이 된 교회일 처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특징은 비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나에게 맡겨진 성도를 섬겨왔나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행정 이상으로, 봉사와 헌금 내역 이상으로, 아픈 마음으로 성도를 대했는가 자문했습니다. 선생님은 “말없이 열심히 출석하는 교인 하나하나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계의 추상성을 벗어나 감정이 관여되는 인간관계가 “이웃”의 관계입니다. 그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 나옵니다. 이웃은 구체적이고 고유한 타자, 특히 그들의 연약함과 필요 속에서 만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인은 이웃이었습니다. 이웃의 관계는 제도나 정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사랑, 책임, 연민이라는 감정적 아픔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웃이나 친구의 관계는 법이나 제도로 모두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는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울고, 웃고, 기쁘고, 좌절하며 감정적 소모가 극심한 것이 목회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발버둥 침 없이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관계의 긴장과 상호 보완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리쾨르는 이 둘의 관계를 불가결한 요소로 이해했다 생각됩니다. 문제는 목회자를 직업인으로 만드는 긴장의 파괴가 목회를 공학으로 변질시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글 쓰는 중, 미국에 계신 권사님이 기쁜 카톡을 보내셨습니다. 결혼 주례 전 상담하며, 아이를 3명 이상 낳으라고 권면 반, 명령 반 했는데, 한국의 며느리가 결국 결혼 10여 년 만에 셋째를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목회의 보람과 즐거움의 기반은 인격으로 만났던 이웃 관계인 것 같습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목사, KCMUSA 이사장)
- 이전글[강준민 목사 목회서신] 깊은 상처, 더 깊은 능력 25.08.25
- 다음글[이상기 목사의 목양칼럼] 옛 교우님과 함께한 30여 년 만의 식사 25.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