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일기] 스위스 종교개혁 교회 답사기 3 - 제네바의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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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레가 시작했지만 그의 이름은 오간 데 없는 로잔 대성당을 뒤로하고 기차에 올라 제네바로 향했습니다.
바젤에서 시작한 이번 종교개혁 교회 답사의 정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우리에게는 ‘칼빈’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 종교개혁자가 죽을 때까지 사역했던 제네바의 생피에르 대성당(Cathédrale Saint-Pierre)입니다.
제네바에 도착해 받은 첫인상은 바젤이나 로잔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호반의 도시였습니다. 레만호 주변으로 사람들이 넘쳐났고, 거리에는 관광객과 상점, 음식점이 가득했습니다. 독일어권의 차분한 바젤과 비교하면 불어권의 제네바는 훨씬 화려하고 활기찼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제네바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국제도시입니다.
하지만 1536년, 스물일곱 살의 칼빈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제네바는 전혀 다른 도시였습니다. 당시 인구는 1만 명 남짓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제네바 주교와 사보이 공국의 영향 아래 있다가 이제 막 정치적 독립과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대학도 없었고, 유럽의 학자들이 몰려드는 지적 중심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엇보다 칼빈 자신도 처음부터 제네바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번 답사기의 첫 도시였던 바젤은 칼빈 당시에도 대학과 인쇄업, 인문주의가 꽃피던 유럽의 중요한 지적 중심지였습니다. 에라스무스가 활동했고, 외콜람파디우스가 종교개혁을 이끌었으며, 유럽 각지의 책과 학자들이 모여들던 도시였습니다.
두 권의 책을 내며 인문주의자이자 개혁파 지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칼빈이 바젤 다음으로 향하려던 목적지는 신성로마제국의 자유제국도시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 였습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인구 2만 명을 훌쩍 넘는 도시로 제네바보다 훨씬 컸으며, 마르틴 부처를 비롯한 뛰어난 종교개혁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이 만나는 국제적인 도시이기도 했던 스트라스부르는 학문적 야심을 가진 젊은 개혁파 지식인에게 무척 매력적인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스트라스부르로 향하기 전에도 칼빈은 오를레앙과 파리 등 프랑스의 주요 도시들을 거쳤고, 이탈리아 페라라까지 찾아가 종교개혁에 호의적이었던 프랑스 왕실 출신의 르네 공작부인의 궁정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의 젊은 시절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학문과 신앙을 펼칠 공간을 찾아 움직이던 야망에 찬 한 젊은 지식인의 모습도 읽게 됩니다.
그렇게 스트라스부르를 향해 길을 나섰으나, 마침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직행로를 이용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칼빈은 할 수 없이 남쪽으로 크게 우회했고, 그렇게 지나가게 된 도시가 바로 제네바였습니다.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던 바젤에서 오늘날 기차로 세 시간 남짓 떨어진 곳이 제네바입니다. 당시에는 며칠을 가야 하는 거리였겠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도시였기에 스트라스부르로 향하던 칼빈에게는 잠시 머물다 떠나기 좋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곳에 파렐이 있었습니다. 뇌샤텔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불같은 성격의 프랑스계 목사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은 당시 이미 제네바에 들어와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파렐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바젤에서 『기독교강요』를 출판한 젊은 프랑스 학자 칼빈이 지금 제네바에 와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파렐은 당시 마흔일곱 살의 노련한 불어권 종교개혁 지도자였고, 칼빈은 이제 막 학문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파렐은 이 젊은 개혁파 지성인을 반드시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곧장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도우라고 요구했습니다.
칼빈은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조용히 공부하고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파렐은 노기 어린 엄숙한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경고를 던졌습니다. 칼빈이 자신의 학문적 평안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일을 외면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평안을 저주하실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칼빈은 훗날 『시편주석』 서문에서 그 순간을 회고하며, 파렐의 말이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손을 뻗어 자신을 붙잡으시는 것처럼 두려움을 주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제네바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칼빈이 걸었던 길들을 직접 거쳐 제네바에 와보니, 이 유명한 일화가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칼빈은 정말 그저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소박한 평안을 찾아 스트라스부르로 가려 했던 것일까요?
칼빈의 전기를 쓴 브루스 고든(Bruce Gordon)은 칼빈을 그렇게 단순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젊은 칼빈에게는 상당한 지적 야심과 자기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자신의 판단과 학문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물두 살에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자비로 출판하며 인문주의 학자로 이름을 알리고자 했던 젊은이가, 스물여섯 살에는 『기독교강요』를 통해 개혁파 진영에서 주목받는 신학 저술가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네바에 들어온 칼빈이 비록 은둔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그 말만으로 그의 내면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바젤이나 스트라스부르보다 덜 유명한 이 작은 도시가 젊은 칼빈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칼빈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걸으며 제가 던져보는 질문일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역하기를 몹시 꺼렸다는 것입니다.
유독 제네바를 꺼린 이유는? 전통적인 칼빈 전기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주로 그의 겸손과 학문적 은둔에 대한 열망,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소명의식이라는 틀 안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과히 틀린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궤적과 그가 향했던 도시들을 직접 따라가다 보니, 그 이면에 있었을 보다 인간적인 이유들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생피에르 대성당을 향해 언덕길을 오르는데, 길가에는 상점과 음식점이 빼곡했고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며 500년 전 칼빈이라면 그다지 반기지 않았을 법한 여러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실없는 농담 한마디가 튀어나왔습니다: “오, 제네바 시민들이여! 칼빈의 앞마당에서 이게 무슨 경건치 못한 모습이란 말입니까?”
결혼식이 있었는지 멋진 컨버터블에 올라탄 신랑 신부의 모습을 뒤로하고 생피에르 대성당 앞에 도착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외부와 달리 비교적 아담하면서도 웅장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내 눈길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성찬대 오른편 설교단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그 앞에 놓인 ‘칼빈의 의자’였습니다. 지금 놓여 있는 것은 복제품이지만, 이곳에서 칼빈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의자를 바라보며 그가 설교단에 올라 말씀을 전하던 모습을 한동안 상상해 보았습니다. 말년에는 스스로 설교단에 오를 힘이 없어 의자에 앉은채로 설교단에 올라 설교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침 교회를 둘러보시던 한 여장로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칼빈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우리에게는 지금의 담임목사님이 더 중요해요”라는 농담과 함께 웃으며 잘 안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현재는 주일예배에 80명 정도 모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칼빈 시대에는 전혀 달랐다고 덧붙였습니다. 당시에는 예배자들로 성당이 가득 차고도 모자라 벽면을 따라 의자를 놓아야 할 정도였으며, 생피에르뿐 아니라 인근 교회들에도 사람들이 몰렸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 초에는 늘어난 개신교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예배 공간까지 필요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 가지는 명확해졌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칼빈은 국제적인 대형교회의 설교자와도 같은 영향력을 누렸던 셈입니다. 칼빈의 시대는 분명 이 교회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역발상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칼빈이 제네바를 변화시켰다면, 제네바는 칼빈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스물일곱 살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들어왔던 청년 칼빈은 세월이 흘러 오십대가 되었고, 그가 설교단에 설 때마다 성당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개신교 난민들이 제네바로 들어왔고, 영국과 스코틀랜드 등에서도 개혁파 인사들이 찾아왔습니다. 칼빈의 책을 읽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의 설교와 강의를 듣고 배운 이들이 다시 목회자가 되어 유럽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설교단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칼빈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고든의 전기에 따르면 실제로 칼빈은 자신을 당대의 사도이자 선지자로 여겼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확신이 점차 강해졌을 것입니다. 자신을 제네바에 옭아매었던 파렐의 무시무시한 경고가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그토록 오고 싶어 하지 않았던 작은 도시가 이제는 국제적인 개혁파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으니 말입니다. 처음에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작고 보잘것없던 제네바는, 결국 그의 가장 거대한 꿈을 실현해 낸 무대가 되었습니다. 제네바는 칼빈에게 너무 작은 무대였을지 모르지만, 그가 머묾으로써 그 작은 무대는 세계를 품는 무대로 넓어졌습니다.
무슨일일까요? 칼빈의 목회 노년은 수많은 갈등과 분쟁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카롤리와의 초기 신학논쟁에서부터 카스텔리오와의 결별, 시의회와 제네바 내 반대파와의 오랜 갈등, 파렐과의 틀어짐, 비레와의 갈등, 그리고 세르베투스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역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생피에르 대성당을 나와 바로 옆에 위치한 국제종교개혁박물관(Musée international de la Réforme)으로 향했습니다.여러 방을 돌며 종교개혁의 역사를 둘러보다 칼빈을 소개하는 공간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업적을 기리는 벽면 하단에 뜻밖의 편지 한 장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 시의회에 보낸 탄원서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비롯한 신학적 문제로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모두에게 이단으로 정죄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제네바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옥에 갇힌 상태에서 시의회에 직접 써서 제출한 탄원서가 바로 그 박물관에 걸려 있던 것입니다. 편지를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라틴어로 적힌 편지 속에서 그는 절박하게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도덕적 범죄나 사법 처벌을 받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니며, 단지 칼빈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갇혀 있으니 풀어달라는 취지의 글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그 편지를 바라보며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왜 하필 칼빈을 소개하는 방 한가운데 세르베투스의 편지를 걸어놓았을까. 물론 세르베투스의 죽음을 온전히 칼빈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은 역사적으로 공정하지 않습니다.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은 제네바 시의회였고, 당시 세르베투스에 대한 사형은 신성로마제국과 여러 도시국가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칼빈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칼빈은 그의 신학적 유죄를 확신하고 재판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칼빈은 화형 대신 칼로 참수하는 교수형(참수형)으로의 감형을 요청했으나, 사형 처벌 그 자체에는 동의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편지를 바라보며, 이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교한 평가인가를 떠나 제네바 시민들과 전 세계가 칼빈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로 그를 기억하되, 그의 외골수적인 면모—자신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았으며 모두가 자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던 그 완고함—까지 함께 기록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16세기를 빛낸 가장 찬란한 인물 중 하나였지만, 그 밝은 빛만큼이나 짙은 그림자를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저 역시 칼빈주의자로서 오랫동안 그를 공부해 왔고 지금도 깊이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를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역사가 고든이 묘사하듯, 칼빈은 천재적이지만 성마르고, 놀라울 정도로 헌신적이면서도 완고했으며,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이들을 견뎌내지 못했던 복잡한 인간이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강한 확신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을 품어주지 못하는 한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장점과 약점은 종종 같은 뿌리에서 자라납니다. 강한 확신은 위대한 신념이 되기도 하지만 독선으로 흘러글 수도 있습니다. 불굴의 의지는 숭고한 헌신을 낳지만 때로는 타협 없는 완고함이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은 한 사람의 일생을 바치게 만들지만, 자칫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하게 만들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제가 제네바 생피에르 대성당에서 만난 칼빈은 거창한 성인이 아닌 '한 인간 칼빈'이었습니다. 그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걸으며 그의 다채로운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네 삶 역시 그러한 여러 모습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면서 내심 사람들의 인정을 갈구합니다. 소명이라 포장하면서도 더 큰 성공을 꿈꾸고, 내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의 뜻이라 합리화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야망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야망을 정직하게 직시하며 끊임없이 성찰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지금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빌린 나의 욕망인가?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증거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환상인가?
내가 옳다고 확신할수록, 나와 다른 타인의 목소리를 얼마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바젤에서 로잔을 거쳐 마침내 제네바에 이르렀습니다. 막상 칼빈의 교회를 찾아갔던 그 시간은, 칼빈을 넘어 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성찰하며 돌아오는 뜻깊은 여정이 되었습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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