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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일기] 스위스 종교개혁 교회 답사기 최종회 – 취리히의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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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9-26 | 조회조회수 : 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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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성 니느웨를 하루 만에 돌았던 요나처럼, 저도 이번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 날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 로잔의 비레, 제네바의 칼빈을 만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도시인 취리히로 향했습니다.


아침 9시경 취리히 중앙역에 도착하여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번에 찾아갈 곳은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가 사역했던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였습니다. 독일어권에서는 대성당을 뮌스터(Münster)로 프랑스어권에서는 카테드랄(cathédrale)이라 합니다. 다시 독일어권인 취리히에서는 그로스뮌스터를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역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지나가던 한 남자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참 친절했습니다. 미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갑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로스뮌스터에 간다고 하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공사 중인 두 개의 탑을 가리키며 그곳이 츠빙글리가 사역했던 교회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사람, 츠빙글리도 알고 역사도 아는 분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츠빙글리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자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그의 표정은 이내 상기되었고 말투도 비웃듯 거칠어졌습니다. 츠빙글리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늘어놓던 이단자였고, 종교개혁이라는 것도 잘못되고 위험한 거짓말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츠빙글리가 군종으로 참전했던 전쟁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 가톨릭 군대가 그를 박살냈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결국 츠빙글리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마땅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교회를 방문하고 싶다면 그로스뮌스터가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리프프라우엔키르헤(Liebfrauenkirche, ‘성모교회’)로 가라고 하더군요. 제가 개신교 목사라고 하자 그의 태도는 더욱 거칠어졌고, 급기야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처음 경험하는 노골적인 종교적 적대감이었습니다. 물론 그 한 사람의 태도를 오늘날 스위스 가톨릭교회의 모습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헤어져 그로스뮌스터를 향해 걸으면서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츠빙글리, 당신은 도대체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을 했기에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저주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입니까?”


이 질문을 품고 취리히 도심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리마트강을 따라 걸으며 그로스뮌스터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 도착하니 조금 아쉬웠습니다. 교회가 한창 보수공사 중이었습니다. 오래된 외벽을 따라 비계가 높이 세워져 있었고, 제가 기대했던 그로스뮌스터의 온전한 모습을 사진 한 장에 담기는 어려웠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안에 들어서자 또 한 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소박했습니다. 로잔 대성당의 장엄함이나 제네바 생피에르 대성당에서 느꼈던 압도적인 공간감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물론 결코 작은 건물은 아니지만 화려한 성상이나 제단 장식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내부는 상당히 절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설교단이 눈에 띄었습니다. 현재의 설교단 자체를 츠빙글리 시대의 것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말씀의 선포를 중요하게 여겨온 개혁교회의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이런 절제된 공간 자체가 이곳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흔적처럼 느껴졌습니다.


츠빙글리는 1519년 이곳 그로스뮌스터의 설교자로 부임했습니다. 당시 취리히는 인구 약 5천 명의 작은 도시였고 아직 가톨릭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이미 에라스무스의 성서적 인문주의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원문 성경을 연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임 후 기존의 교회력에 따라 정해진 본문만을 설교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마태복음 1장부터 차례대로 본문을 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성경강해는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츠빙글리는 빠르게 취리히에서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부임 4년째인 1523년부터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본격적인 종교개혁가로 등장합니다. 1524년에는 교회에서 성상들이 제거되기 시작했고, 1525년에는 가톨릭 미사가 폐지되고 개혁된 형태의 성찬이 시행되었습니다. 교회 안의 성상과 제단 장식들이 사라지면서 그로스뮌스터 역시 말씀과 성례를 중심으로 하는 절제되고 담백한 개혁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갔습니다.


몇 해 전 은사이신 주도홍 교수님의 『개혁신학의 뿌리 츠빙글리를 읽다』를 읽으며 저는 츠빙글리의 삶과 신학을 제법 깊이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개혁교회가 종교개혁을 말할 때 흔히 루터와 칼빈에게 집중하는 동안, 그보다 앞서 스위스 개혁파 종교개혁의 길을 열었던 츠빙글리를 ‘개혁신학의 뿌리’에서 다시 바라보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츠빙글리가 흥미로운 것은 그의 개혁이 교회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예배 몇 가지를 고치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바뀌어야 했고, 교육이 바뀌어야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방식이 바뀌어야 했습니다. 도시의 정치와 사회질서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정의 아래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공적 삶(public life)’의 변혁까지 포함한다고 주도홍 교수님이 설명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로스뮌스터에 앉아 있으면서, 바로 그 지점에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도시를 함께 개혁하려 했기에 츠빙글리에게 교회와 국가의 경계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그와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초기 동료들과의 갈등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콘라트 그레벨(Conrad Grebel)과 펠릭스 만츠(Felix Manz) 등이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를 거부하고 신앙을 스스로 고백한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츠빙글리는 그들과 결별했습니다. 당시 주민등록과 같았던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것을 츠빙글리는 신학적으로 행정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취리히 시정부 역시 이때부터 이들 재세례파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옛 동료였던 만츠는 1527년 리마트강에서 익사형을 당했습니다. 재세례의 물을 그렇게 사랑하니 물속에서 익사시키는 잔인한 죽음이었습니다. 물론 그를 처형한 것은 츠빙글리 개인이 아니라 취리히 시정부였지만, 츠빙글리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개혁자가 국가권력과 지나치게 가까워질 때, 개혁은 오히려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정치적 갈등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1520년대 후반 스위스 구연방은 종교적으로 둘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취리히와 베른 등은 개혁파가 되었지만, 루체른과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등의 산악 칸톤들은 가톨릭 신앙을 지켰습니다. 1529년 양 진영은 결국 카펠에서 군대를 이끌고 서로 마주 섰습니다.


다행히 이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양측 지도자들이 협상하는 동안 대치하고 있던 병사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쪽에서는 우유를, 다른 쪽에서는 빵을 가져와 큰 솥에 넣어 함께 먹었다는 유명한 ‘카펠의 우유수프(Kappeler Milchsuppe)’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신앙의 모습은 달랐지만 그래도 같은 스위스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그렇게 싸우지 않고 헤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그러한 타협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위스 구연방에서 종교개혁이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 지역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가톨릭 칸톤들과의 정치적 대립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결국 취리히와 베른은 가톨릭 다섯 칸톤에 곡물과 소금 등의 공급을 차단하는 경제봉쇄까지 시행했습니다. 종교적 확신이 정치적 대결과 경제적 압박으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결국 불과 2년 뒤인 1531년, 양쪽 군대는 다시 카펠에서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2년 전 한 솥에 빵과 우유를 넣어 함께 먹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서로에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약 500명의 취리히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취리히군의 군목으로 전장에 동행했던 47세의 츠빙글리도 있었습니다.


결국 츠빙글리는 자신이 사랑했고 개혁하려 했던 도시의 시민들과 함께 전장으로 갔고, 1531년 10월 11일 카펠에서 죽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그의 시신은 발견되었고, 이단자의 것으로 취급되어 불태워졌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과 4년 전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옛 동료 펠릭스 만츠가 잘못된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츠빙글리 자신이 가톨릭 진영에 의해 이단자로 취급되어 그 시신이 불태워졌습니다.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힘으로 제거하려 했던 그 시대의 비극에서 가톨릭도, 개혁파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취리히를 사랑했고 자신의 종교개혁을 스위스 사회에까지 확산시키려 했던 츠빙글리의 비극적인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적 확신은 어디까지 정치권력과 손을 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츠빙글리에게 주어진 종교개혁의 시간은 불과 8년이었습니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가 죽었다고 취리히의 종교개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펠 전쟁에서 취리히는 패배했지만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과 스물일곱 살이었던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가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취리히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츠빙글리가 짧은 시간 동안 열어놓은 개혁의 길을 불링거는 무려 44년 동안 안정시키고 뿌리내렸습니다.


그는 카펠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며 취리히 교회를 재건했고, 츠빙글리 시대보다 교회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보다 신중하게 조정했습니다. 1549년에는 제네바의 칼빈과 ‘취리히 합의(Consensus Tigurinus)’를 이루어 취리히와 제네바의 개혁파 성찬 전통을 연결했습니다. 또한 그가 작성한 『제2스위스 신앙고백』은 이후 유럽 여러 지역의 개혁교회가 받아들이는 중요한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그 신앙고백 제1장에는 개혁파 설교론을 압축하는 유명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종교적 권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말씀이 교회를 끊임없이 판단하고 새롭게 해야 한다는 개혁파 전통은 취리히의 츠빙글리와 불링거에게서 강하게 드러납니다. 흥미롭게도 수백 년 뒤 바젤의 칼 바르트 역시 이 불링거의 유명한 선언을 긍정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바젤에서 시작한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 취리히에서, 뜻밖에도 불링거와 바르트가 다시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그로스뮌스터 안에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500년 전 바로 이곳에서 츠빙글리가 성경을 펼쳤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설교했고, 논쟁했고, 자신의 도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가 품었던 그 비상한 기대와 소망은 얼마나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 때 취리히역에 도착했을 때 만났던 그 남자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우리 가톨릭 군대가 츠빙글리를 박살냈다.” 500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 속에서 종교적 적대감은 때로 500년도 살아남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남자만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종교, 다른 교파,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오늘 우리 자신이 던지는 수많은 공격적인 말과 생각을 돌아보면 우리 역시 그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와 교회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단지 누가 옳았고 누가 틀렸는가, 누가 이겼고 누가 졌는가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물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은 왜 때때로 다른 사람을 반드시 물리쳐야 할 적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오늘 우리가 계승해야 할 종교개혁의 유산인가.


교회 밖으로 나오니 그로스뮌스터는 여전히 비계에 둘러싸여 보수공사 중이었습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아쉬웠던 그 모습이 돌아설 때는 오히려 묘한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후대의 개혁파 전통에서 자주 사용되어 온 말이 있습니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물론 츠빙글리는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두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시대의 한계가 있었고, 그의 개혁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번 개혁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의 개혁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다시 세워야 하는지.

특히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굳게 붙들면서도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수공사 중인 그로스뮌스터를 뒤로하며 저의 짧은 스위스 종교개혁 교회 답사를 마쳤습니다. 바젤에서 외콜람파디우스를 만나고, 로잔에서 비레를 만나고, 제네바에서 칼빈을 만나고, 마지막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와 불링거를 만났습니다.


500년 전의 종교개혁은 이제 찬란한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혁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우리 시대의 거룩한 과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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