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24. 헤밍웨이, 기독교, 그리고 『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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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문학을 읽다 보면, 우리는 자주 십자가의 그림자와 마주칩니다. 그 십자가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피 흘림이 있습니다. 희생과 품위, 고독과 침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이 명확하게 고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십자가라기보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고통을 견디려는 십자가에 가깝습니다. 헤밍웨이는 20세기 문학에서 이 “하나님 없는 십자가”를 가장 강렬하게 그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헤밍웨이는 기독교 문화에서 태어난 작가입니다. 그는 1899년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고, 경건한 개신교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자연과 야외 생활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음악과 예술적 감수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유년기는 교회, 성경, 도덕적 규범, 예술, 자연이 함께 얽힌 세계였습니다. 말하자면 헤밍웨이는 기독교적 언어와 상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세계 안에서 자랐고, 그 세계의 그림자를 평생 문학 안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를 단순히 “기독교 작가”로 분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삶은 신앙의 질서보다 전쟁, 사랑, 상실, 술, 모험, 폭력, 창작의 고독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미국 적십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전쟁 경험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인간의 몸이 얼마나 쉽게 찢어지는지,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인간의 믿음과 낭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잔혹한 학교였습니다.
헤밍웨이의 작품 곳곳에는 기독교적 모티프가 스며 있습니다. 고난받는 의인, 피 흘리는 손, 희생, 죽음, 연민, 부활의 그림자 같은 이미지들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복음의 체계 안에서 안정적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품위를 지키는가, 세계가 무의미해 보일 때에도 어떻게 무너지지 않으려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의 대안은 은혜보다 의지에 가깝고, 구원보다 품위에 가깝습니다.
그 정점에 『노인과 바다』가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입니다. 그는 85일째 다시 바다로 나아가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입니다. 손은 찢어지고, 몸은 한계에 이르며, 고독은 점점 깊어집니다. 마침내 그는 물고기를 붙잡지만, 귀환의 길에서 상어들이 그 성취를 뜯어먹습니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은 살이 아니라 뼈입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완전히 패배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중얼거리는 유명한 문장,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헤밍웨이적 인간관의 결정체입니다. 이 문장에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인간의 마지막 자존이 있습니다. 인간은 부서질 수 있습니다. 늙을 수 있습니다. 피 흘릴 수 있습니다. 성취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아직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복음은 아니지만, 인간 존엄을 향한 치열한 문학적 증언입니다.
『노인과 바다』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산티아고의 손바닥 상처, 고통의 신음, 돛대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모습, 집에 돌아와 팔을 벌린 듯 엎드린 자세는 많은 독자에게 십자가의 형상을 연상시킵니다. 헤밍웨이는 이것을 설교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면은 조용히 말합니다. 한 인간이 자기 짐을 지고, 피 흘리며, 외로운 길을 걸어간다고. 독자는 그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수난의 이미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신학적 분별이 필요합니다. 산티아고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의 고난은 구속적 고난이 아닙니다. 그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지 않습니다. 그는 빈 무덤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희생하지만 부활하지 않습니다. 그가 얻는 승리는 영적 구원이 아니라 도덕적 존엄입니다. 그는 세속적 메시아처럼 보일 수 있지만, 메시아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의 십자가는 깊고 아름답지만, 끝내 “하나님 없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없는 십자가는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한계도 드러냅니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품위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만으로 죽음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상어에게 물고기의 살을 빼앗기고도 정신의 자존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의 권세를 폐할 수는 없습니다. 헤밍웨이의 위대함은 인간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보여 준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인간이 끝내 무엇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지를 드러낸 데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말년에 깊은 불안과 우울을 겪었고, 결국 1961년 7월 2일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의 죽음을 선정적 호기심으로 소비해서도 안 되고, 단순한 도덕적 실패로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고 썼던 작가 자신도, 깊은 내면의 어둠 앞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인간이었습니다. 강한 문장을 쓴 사람도 약할 수 있습니다. 바다를 견딘 노인을 쓴 사람도 자기 안의 바다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헤밍웨이의 문학을 아프게 읽습니다. 우리는 산티아고의 존엄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산티아고의 존엄이 복음은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헤밍웨이의 상처를 애도합니다. 그러나 그의 상처가 구원의 완성은 아님을 압니다. 복음은 인간의 고귀한 투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투쟁이 은혜 없이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의지는 귀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인간의 품위는 아름답지만, 인간의 품위가 구원자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본래 인간의 품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끝까지 버티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상처와 죽음의 자리로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산티아고의 손은 낚싯줄에 찢긴 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손은 못 박힌 손입니다. 산티아고는 자기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리지만,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피 흘리십니다. 산티아고는 뼈만 남은 청새치를 끌고 돌아오지만, 그리스도는 죽음을 지나 빈 무덤으로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초대는 더욱 깊게 들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은 산티아고 같은 인간, 헤밍웨이 같은 작가, 그리고 우리 같은 신앙인을 향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려 합니다. 어떤 이는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어떤 이는 실패의 십자가를 지고, 어떤 이는 우울과 고독의 십자가를 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 십자가를 혼자 지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 교회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로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더 강해지라고 말합니다. 더 버티라고, 더 견디라고, 더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지 인간의 인내를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먼저 그리스도께 오라는 초대입니다. 신앙은 자기 힘으로 끝까지 버티는 기술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힘이 다한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에 기대는 삶입니다. 교회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산티아고처럼 버티라고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 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어 주어야 합니다.
『노인과 바다』는 기독교인에게 불편하면서도 필요한 거울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품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 줍니다. 동시에 은혜 없는 품위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십자가가 얼마나 장엄한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장엄함이 끝내 안식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말해 줍니다. 산티아고의 침묵은 고귀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산티아고의 상처는 진실합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그리스도의 상처 앞에서 비로소 은혜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도 때로 빈 배로 돌아옵니다. 오래 수고했으나 남은 것은 뼈뿐일 때가 있습니다. 사랑했으나 오해가 남고, 헌신했으나 열매가 보이지 않으며, 싸웠으나 성취가 훼손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에게 산티아고처럼 버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한 걸음 더 깊이 말합니다. 버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그리스도께 오라고. 인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시 배우라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헤밍웨이는 하나님 없는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그림자 너머에서 우리는 참된 십자가를 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마지막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파괴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자존이 아니라, 파괴된 인간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정복됩니다. 산티아고는 바다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바로 그 차이가 문학과 복음의 차이이며, 동시에 헤밍웨이를 읽는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가장 깊은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입니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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