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23. 헤밍웨이의 남성성, 몸의 상처, 그리고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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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남자가 멋집니다. 헤밍웨이를 떠올리면 먼저 강한 남자의 이미지가 따라옵니다. 전쟁, 사냥, 낚시, 투우, 술, 권투, 바다. 그는 20세기 문학에서 남성적 모험의 상징처럼 기억됩니다. “파파 헤밍웨이”라는 별명도 그런 이미지를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학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강인함은 단순한 자신감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그것은 상처를 가리는 갑옷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이의 남성성은 천성적 힘의 표현이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나는 강하다”고 증명해야 했던 불안의 방어막처럼 읽힙니다.
그의 삶에서 결정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부상이었습니다. 헤밍웨이는 미국 적십자 자원봉사자로 이탈리아 전선에 갔고, 1918년 7월 8일 포살타 디 피아베 부근에서 포탄 파편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전기 자료들은 그때 수많은 금속 파편이 그의 몸에 박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 경험은 훗날 그의 문학 세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전쟁은 그에게 인간의 몸이 얼마나 쉽게 찢어질 수 있는지, 인간이 믿고 있던 강함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각인시켰습니다.
이 전쟁의 상처를 곧바로 성적 무능력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헤밍웨이는 네 번 결혼했고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생물학적으로 “무력한 남자”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문학적으로도 조잡한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산 기능의 유무가 아닙니다. 문제는 몸이 손상되었다는 기억이 한 남자의 자기 이해와 남성성의 불안을 어떻게 형성했는가입니다. 전쟁은 그에게 남성적 완전성이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의 몸은 강한 듯 보여도 상처 입을 수 있습니다. 남자의 몸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불안은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제이크 반스에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제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부상으로 성적 결합이 불가능해진 인물입니다. 그는 브렛 애슐리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육체적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상처를 노골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략합니다. 바로 그 생략이 고통을 더 크게 만듭니다. 말하지 않는 상처가 작품 전체를 지배합니다. 성적 행위의 부재가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력한 성적 고통의 표현이 됩니다. 이것이 헤밍웨이 문학의 아이러니입니다.
『해는 다시 떠오른다』에서 투우는 그래서 단순한 스포츠가 아닙니다. 그것은 피, 힘, 통제, 위험, 몸의 리듬이 결합된 남성성의 의식처럼 보입니다. 수소와 투우사, 뿔과 검, 관객의 열광은 모두 잃어버린 활력과 통제력에 대한 강렬한 대체 이미지가 됩니다. 제이크는 그것을 해설하고 이해하지만, 그 세계의 중심에 서지는 못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성적 에너지에 이끌리는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그의 비극은 욕망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욕망은 있으나, 그 욕망을 온전히 표현해낼 몸의 능력을 잃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사이의 일화도 이 문제를 비추는 어두운 거울입니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의 한 장면에서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조롱 때문에 자신의 성적 능력과 신체에 대해 불안해하고, 헤밍웨이는 그를 확인하고 위로하는 기묘한 장면을 회고합니다. 이 일화는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동시에 비극적입니다. 그것은 단지 피츠제럴드 개인의 연약함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길 잃은 세대의 남성들이 얼마나 깊이 성적 능력, 신체, 자존심, 남성적 인정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남성성은 그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시험장이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유년기도 이 해석에서 종종 거론됩니다. 일부 전기 작가들은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가 어린 헤밍웨이와 누나 마셀린을 한동안 비슷한 복장과 모습으로 꾸몄던 경험을 언급합니다. 이런 유년기 경험이 훗날 헤밍웨이의 성격 전체를 결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훗날 그가 남성성을 과도하게 증명하려 했던 심리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해석되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의 성 역할 혼란, 전쟁의 신체적 상처, 문학적 명성 속에서 형성된 남성적 신화가 그의 삶 속에서 복잡하게 얽혔습니다.
이 지점에서 “강한 남자 증후군”이라는 표현은 하나의 유용한 은유가 됩니다. 이것은 임상 진단명이 아닙니다. 약함을 견디지 못하는 남성성의 병리적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강해야 한다. 울지 않아야 한다.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성적으로 능력 있어야 한다. 언제나 지배해야 한다. 이런 명령들이 한 인간을 붙들면, 남성성은 은사가 아니라 감옥이 됩니다. 생명의 에너지인 욕망도 자기 증명의 도구가 될 때 사랑을 무너뜨립니다. 인간은 관계하지 못하고 수행하게 됩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증명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은 창조 질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창세기 1장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성과 몸과 욕망은 본래 수치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몸은 선합니다. 그러나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선물을 우상으로 바꿉니다. 남성성도, 여성성도, 성적 능력도, 젊음도, 매력도 인간의 정체성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 자리에 앉을 때, 몸은 은혜의 자리가 아니라 불안의 제단이 됩니다.
바울은 약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는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약함을 미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약함 자체가 선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약함은 인간을 진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세계에서 약함은 감추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약함은 하나님께 내어 드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는 흥미로운 전환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심에 서는 것은 젊고 완전한 남성성이 아닙니다. 늙고 상처 입은 남성성입니다. 산티아고의 손은 찢어지고, 몸은 지치며, 성취는 상어에게 뜯깁니다. 그는 힘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보다 큰 세계 앞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입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 남성성을 정복의 힘에서 견딤의 품위로 옮겨 놓습니다. 젊은 몸의 활력이 아니라, 늙은 손의 신실함이 중심에 섭니다.
복음은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인간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견딤만으로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산티아고의 품위는 귀합니다. 그러나 산티아고의 품위가 복음은 아닙니다. 참된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옵니다. 산티아고의 손은 낚싯줄에 찢긴 인간의 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손은 못 박힌 구원의 손입니다. 산티아고는 자기 싸움을 감당하기 위해 피 흘렸지만,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피 흘리셨습니다.
우리도 이 주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많은 남성 리더들이 강함의 갑옷을 입고 삽니다. 목회자답게, 아버지답게, 교수답게, 장로답게, 지도자답게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기 두려움과 성적 불안과 외로움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침묵한 약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종 분노, 통제, 중독, 경쟁, 냉소, 관계의 폭력으로 되돌아옵니다. 교회는 남성에게 강한 척하는 법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약해지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헤밍웨이의 비극은 그가 남성성을 너무 강조했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남성성을 너무 두려워했습니다. 강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고, 증명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았을지 모릅니다. 그는 강함의 신화를 세웠지만, 그 신화는 그의 상처를 숨길 수는 있어도 치유하지는 못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강함과 부드러움, 욕망과 절제, 독립과 의존, 몸과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성과 몸에 대해 더 정직하고 더 거룩한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을 더럽게만 말해서도 안 되고, 성적 능력을 인간 가치의 기준처럼 말해서도 안 됩니다. 몸은 하나님의 창조이고, 욕망은 절제와 사랑 안에서 다스려져야 할 선물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욕망은 쉽게 지배와 소비와 자기 증명으로 변질됩니다. 복음은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은혜 아래에서 새롭게 질서 짓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몸은 수치의 감옥이 아니라 성령의 전이됩니다.
헤밍웨이는 평생 “진짜 남자”라는 허상을 좇으며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려 했던 사람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새 사람”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강함은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참된 리더는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고 주위를 제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욕망을 겸손히 은혜 아래 두는 사람입니다. 참된 성숙은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사랑하는 힘에서 드러납니다.
은혜는 강함과 약함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나의 강함을 증명해야 하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 앞에서 남자는 더 이상 강한 척할 필요가 없고, 여자는 더 이상 대상화될 필요가 없으며, 인간은 더 이상 성적 능력이나 사회적 성공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갇힌 “강한 남자”의 허구를 벗고, 이제 참된 자유가 있는 “새 사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새 사람은 약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욕망을 우상화하지도 않습니다. 몸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강함을 자랑하지 않고, 은혜를 자랑합니다. 헤밍웨이의 상처 입은 남성성은 우리에게 인간의 불안을 보여 줍니다. 복음은 그 불안 너머에서 우리를 부릅니다. “너는 증명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은혜로 새롭게 된 존재다.” <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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