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리멤버와 비움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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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선배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아내가 한동안 우울해 했다. 그분은 생을 마감하기 전, 가족과 친지들을 호텔에 모아 조용한 송별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모교의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도 마련해 두었고,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물건과 재산도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다는 이야기였다. 마지막까지 삶을 정돈하고 떠난 사람.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도 언젠가 죽은 뒤에 ‘정리가 잘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문제는 내가 붙들고 있는 수많은 잡동사니들이다. 아내는 그 사연을 대강이나마 알겠지만, 자식들은 그 것들에 담긴 기억과 시간을 알지 못한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전교 1등 상품으로 받았던 작은 옥편이 있다. 한자를 음과 뜻으로 풀이한 조그만 사전이다. 평생 열 번도 펼쳐보지 않았으면서도, 나는 그것을 이민 가방 속에 끼워 넣어 이곳까지 가져왔다. 지금도 책장 한쪽에 조용히 꽂혀 있다. 왜 버리지 못하는 걸까.
이민 오던 해에 한 목사님이 선물로 주신 작은 도자기도 있다. 지금도 우리 집 패밀리 룸 한 켠에 좌정하고 있다. 그 도자기를 바라볼 때마다 이민 길 위에서 들었던 격려의 말과 기도의 온기가 떠오른다.
수년 전 골프를 시작하면서 처음 친 공, 이른바 ‘머리 올린 공’에 골프 입문 날짜를 적어 두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골프를 시작한 날이 무슨 구원의 날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저 새로운 취미의 시작이었을 뿐인데, 나는 그 공을 통해 그날의 설렘과 어색함과 작은 성취감을 붙들어 두고 싶었던 것 같다.
이렇듯 사소한 물건들이 집 안 여기저기에 쌓여 있다. 만약 내가 어느 날 돌연사라도 한다면 가족들은 그것들을 내다버리면서 얼마나 불편해할까. 대부분은 덤프트럭에 실려 한꺼번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단순한 ‘저장 강박’? 아니면 기억을 붙들어 두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몸부림? 생각해 보면 나는 물건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같다. 옥편에는 어린 시절의 성취감과 부모님의 미소가 스며 있고, 도자기에는 타향에서 다시 시작하던 날의 떨림과 기도가 배어 있다. 골프공에는 중년의 어느 날, 새로운 세계 앞에 섰던 나 자신의 모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은 단순한 잡동사니가 아니라, 내 삶의 여정을 증언하는 작은 기념비들인지도 모른다.
‘리멤버(Remember)’라는 단어를 들으면 누군가는 John Lennon의 노래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단어는 교회 안에서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지닌다. 많은 교회의 성찬상(Lord’s Table)에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THIS DO IN REMEMBRANCE OF ME)”는 주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특히 성공회나 루터교 전통의 성찬상에는 ‘REMEMBER’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다. 기억하라는 명령의 강조, 곧 신앙의 중심을 일깨우는 상징이다.
신앙은 기억 위에 서 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고(과거),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재를 기억하며(현재), 다시 오실 약속을 기억하는 것(미래)이 곧 믿음의 핵심이다. 성경이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외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붙들고 있는 물건들 속의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것이 신앙의 기억과 같은 무게를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일과, 골프공을 들여다보며 첫 라운딩의 감격을 떠올리는 일은 분명 다른 차원의 기억이다. 그러나 인간이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 작은 물건들도 내 삶의 한 단면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해왔는지 모른다.
문제는 균형일 것이다. 기억은 소중하지만, 기억을 빌미로 쌓아 두는 습관은 또 다른 집착이 될 수 있다.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이 사실은 놓지 못하는 미련의 변명일 수도 있다. 신앙이 “기억하라”고 명령할 때, 동시에 “비우라”고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십자가를 기억하되, 탐욕은 비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조금씩 생각을 바꾸어 본다. 언젠가 쓰레기가 될 물건들을 미리 정리하는 것도 하나의 영성일 수 있겠다고. 정돈은 단순한 청소 행위가 아니라, 삶을 돌아보는 의식일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선뜻 놓지 못하고 서성인다. 가열차게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다. 아마도 ‘조금은 더 살 수 있겠지’ 하는 은근한 기대, 아직은 정리할 때가 아니라는 자기 위로 때문인가? 어쩌면 그것은 삶에 대한 애착이면서 동시에, 떠날 준비를 미루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조명환 목사(크리스천 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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