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이면 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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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가 되면 여름과 가을이 줄다리기를 합니다. 더운 기운으로 온 땅을 하루라도 더 덮으려는 여름과 서늘한 바람으로 세상을 어서 빨리 식히려는 가을의 힘겨루기가 한창입니다. 여름과 가을의 주도권 다툼이 아무리 치열해도 계절끼리 하는 줄다리기에서 승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여름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가을을 이길 수 없고, 가을이 높은 하늘을 아무리 자랑해도 겨울 추위를 미룰 수 없습니다. 겨울의 매서움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봄기운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마찬가지로 봄바람이 아무리 좋아도 여름이 오면 더위에 길을 내줘야 합니다.
계절끼리 겨루는 줄다리기는 공평합니다. 두 번 이긴 계절이 없고, 두 번 진 계절도 없습니다. 승리와 패배를 한 번씩 공정하게 나누다 보면 한 해가 가기 마련입니다. 승자는 정해져 있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줄다리기는 어김없이 다시 시작됩니다.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여름이 꽉 붙잡고 있던 줄이 조금씩 가을 쪽으로 넘어가는 듯합니다. 여름의 기세는 이렇게 꺾일지 모르지만, 올여름이 지난 자리에는 유난히 상처가 많이 남았습니다. 빙하가 녹아내리며 드러내는 속살은 지구의 온난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려줍니다. 기록적인 강우량을 동반한 태풍과 홍수가 많은 이의 삶의 터전을 빼앗으며 피해를 주었습니다. 가뭄과 산불은 산과 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마저 타들어 가게 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역대급으로 수위가 낮아지면서 세계 곳곳에서 ‘헝거스톤(Hunger Stone)’이 나타나는 것도 올여름이 남기고 간 흔적입니다. 강물이 마르면서 노출되는 헝거스톤은 극심한 가뭄과 기근을 예고하는 지표로 ‘기근석(饑饉石)’이라고도 불립니다.
강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헝거스톤’이 드러날 정도의 큰 가뭄이 들었다면, 이로 인한 흉작, 식량 부족, 물가 급등, 굶주림 등이 나타나는 것이 분명하기에 헝거스톤을 ‘배고픔의 돌’ 또는 ‘슬픔의 돌’이라고도 합니다.
독일과 체코 사이를 흐르는 엘베강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유명한 헝거스톤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내가 보이면 울어라! (Wenn du mich siehst dann weine!)’ 수백 년 전 강물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의 가뭄으로 굶주렸던 이들은 이 구절을 ‘헝거스톤’에 새겨 후세들에게 경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헝거스톤에 새겨진 ‘내가 보이면 울어라!’라는 문구를 떠올리는데, 우리 인생에도 그런 문구가 새겨진 헝거스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가 보이면 회개하며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면 감사하며 울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보이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보혈을 기억하며 울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예배당에도 아름다운 십자가가 있습니다. 찬송가와 성경 구절을 비추는 스크린에 가려 정작 예배 시간에는 보이지 않던 십자가였습니다. 지난주에 예배당 양쪽에 TV를 달면서 그 십자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예배당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걸려 있는데, 우리 교회에 걸려 있는 십자가는 금속으로 만든 십자가입니다. 금속으로 된 십자가라도 면이 고르고 반듯한 십자가를 걸어놓을 텐데 우리 교회에 있는 십자가는 면도 고르지도 않습니다. 거친 면이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알록달록하게 보이는 십자가가 투박하게 달려 있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십자가지만, 그 십자가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은 거칠고 투박한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가장 뚜렷한 상징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우리는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얼굴을 드러내고 구원의 신비를 증거하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보이면 울어라!’ 헝거스톤을 보면서 배고픔과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면, 십자가를 보며 흘리는 눈물은 구원의 감격으로 흘리는 눈물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내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눈물입니다. 세상의 편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의 눈물입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울 수 있는 우리야말로 복된 신앙인입니다.
이창민 목사(LA연합감리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