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목사의 음악목회 이야기] 이사야 6장: 성경적 예배의 창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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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장: 성경적 예배의 창문(2)
Richard C. Leonard
번역:김영국 목사
더 나아가 지진, 불, 연기의 형상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현현과 연관되어 집니다. 이 형상은 시내산 현현 (출19:18)에서 발견되며 시18:7-15절 같은데서 상세히 설명됩니다. 시 97:2,3절은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신4:24;히12:29)로 비유 됩니다. 이런 모습은 이사야의 비전에서도 발견됩니다. 이사야는 6:4절에서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 한지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성전예배의식에서 향의연기를 마음에 떠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는 또한 성전 앞에 놓여있던 제단에 핀 숯을 언급합니다.
그 불의 이미지는 또한 스랍들에 대한 이사야의 묘사 속에 전달 됩니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의 존재의 본성에 관하여 오직 추측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스랍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원어 s-r-f “타오르는”에서 나온 “타는 존재”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비전의 스랍들은 여호와를 섬기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104:4;히1:7) 하지만 이 비유적 묘사의 배경은 아마도 제단의 불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같은 단어가 민수기21: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불뱀”에 사용 되는 것으로 보아 스랍들은 불같은 뱀 모양의 생물들로 언급한 것 같습니다. 이 불뱀으로 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모세는 놋 뱀을 만들었고 왕하18:4절을 보면 우리가 아는 대로 개혁의 히스기야 왕 (715-687 BC)은 백성들이 그 놋 뱀을 향해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이사야의 비전이 있던 때에 (웃시야왕이 죽던해 740BC) 그 놋 뱀이 성전에 있었을 것이며 이사야의 스랍들의 묘사의 가시적 배경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라고 서로 창화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교창, 응답송, 혹은 찬미처럼 들립니다. 그것은 어쩌면 성전 음악인들이 성가대들로 나뉘어 서로 화창하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성전음악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지만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이러한 교창의 노래가 이스라엘 예배의 일환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배자의 응답
하나님의 집의 실제적 예배에서의 이사야의 비전의 가능한 배경을 그 광경과 소리와 건축환경의 풍부한 이미지와 함께 자세히 설명하는데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이사야가 우리 앞에 설정해 놓은 것은 성전과 그 예배의 순서의 실제적 설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의 성령이 예배의 행위 중에 그에게 임하심에 대한 선지자 개인적 응답의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성경적 모델로써 오늘 우리의 예배를 재 구성하는 어떤 방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사야의 경험이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경험될 수있는 예배의 내적변화와 분위기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예배의 외적설정이 중요하며 우리는 건축과 예배장소의 시각적 및 청각적 측면에 매우 잘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예배는 외부적 설정이 무엇이든 간에 “신령과 진리의 예배” 이고 이사야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에게 예배는 보좌에 높이 들리신 경외와 찬양의 주제인 하나님의 위엄의 비전에서 시작합니다. 스랍들의 찬송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그의 영광의 우주적 압권을 경축합니다. 예배의 첫 동기는 “여호와는 광대하시고 극진히 찬송 하리로다” (시48:1) 는 이러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개념에서 와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축하 하는데서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엄을 대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의 무가치함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부르짖습니다. “화로다 나여,….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사6:5) 그는 예배자로서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백성들의 죄도 깨닫게 됩니다.
찬양과 경배로 주 앞에 나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분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히12:21)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 무가치함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의 전체 구조의 죄와 부패를 고백함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ㅡ 잘못된 가치와 거짖된 인식이 우리의 삶을 침투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표현 할 수 없는 부정한 입술이 되게하는 우리의 사회를 말입니다. (롬1:18)
그러나 시130:4 절은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라고 말씀 합니다. 제단에서 가져온 핀 숯을 입술에 대므로 이사야는 정결케 됩니다.ㅡ그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의 희생을 통한 믿는 자를 중재하는 용서와 정결을 묘사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말 합니다. “네 죄가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6:7) 예배는 사죄함, 즉 사랑의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삶의 갱신을 가져 옵니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 한번 고백되고 제단에 바쳐진 죄성의 우리 자아는 그분과 더 가까이 함께 하는데 방해되는 장벽을 제거하며 떨어져 나가기 시작 합니다.
그때 이사야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6:8). 예배는 사명, 즉 왕을 섬기기 위한 부르심을 의미하며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완성 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드리는 것 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헌신으로 응답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것은 우리를 소유하시고 계시는 그 거룩하신 분은 우리를 잘못 사용하시지 않으리라는 신뢰에서 나온 헌신 입니다. 오직 예배 만이 이 것을 알게 합니다. 거기에 응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빌2:13)을 발견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무감각하고 반응이 없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6:9-11) 그러나 이 심판 까지도 십분의 일 혹은 한 구루터기 일찌라도 하나님의 왕국의 긍극적 회복을 위한 그분의 계획의 일부 입니다. (6:13) 살아계신 하나님의 비전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예배를 통해 늘 갱신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확신 하는 것 입니다. (고전15:58)
예배는 정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습니다. 예배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사야의 비전은 일련의 분위기나 움직임을 통하여 대면, 고백, 성결, 사명, 헌신, 확신 같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데려 갑니다. 그것은 예배의 효율성을 결정하는 예배의 순서나 실제적 배경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예배에 유용한 보조물 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가 원하시는 곳에서 우리를 소유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성령께서 예배의 움직임을 통하여 우리를 데려 가시도록 우리가 허락하는 정도에 의해 이루어 집니다.
필자 김영국 목사는 대광고와 한양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신학과 음악목회를 공부하였고, 척 스윈돌 목사와 그의 음악목사이며 스승인 하워드 스티븐슨의 영향을 받았으며, 27년 동안 남가주 오렌지카운티의 큰빛한인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지금은 저서와 번역, 그리고 웹사이트 매거진 “예배음악”(Worship Music)에서 음악목회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자신의 음악목회 경험과 사역을 나누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장로교출판사가 펴낸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음악목회 프로그램”,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찬양과 경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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