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번역자에게 드리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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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번역(飜譯)은 반역(反逆)이라고 합니다. 다른 언어를 번역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완벽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번역이란 문화를 넘어 의미를 옮겨놓는 일이기에, 그 온전한 의미 전달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수학이나 기하학처럼 의미의 100%가 이전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번역을 창작(創作)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즐겨 읽던 쉽지 않은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면, 그리고 그 책이 잘 번역되었다면, 이는 너무도 고마운 일입니다.
최근 제가 참여하는 한국의 한 학회에 책 소개가 실렸습니다. 『성도들이 일으킨 혁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급진주의 정치』(The Revolution of the Saint, 1965)라는 책입니다. 칼빈주의, 청교도 목사와 청교도 혁명 등에 관한 흥미로운 소개서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라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유명한 정치사상가입니다. 이 책은 그의 하버드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그 학교에서 출판한 것인데, 이제야 우리말로 옮겨졌습니다.
왈저의 책을 처음 만난 때는 1980년대 중반입니다. 청강하던 종교학과 나학진 교수님의 “현대 기독교 사상” 강의에서 교과서로 소개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의 복사본을 가지고 미국과 한국을 두 번이나 오갔습니다. 한 번은 청교도 목사에 대한 강의를 위하여 정리하여 발표하였고, 독서 모임에서 몇 번에 나누어 발표하고 토론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책이 정치철학과 현상학에 정통하신 류의근 교수님에 의하여 번역되었습니다. 저도 서문을 번역했던 적이 있기에, 류 교수님의 노고와 업적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그리고 종교개혁 505주년 기념판으로 출판한 대장간 출판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전에도 왈저의 작은 책, 『출애굽과 혁명』(Exodus and Revolution)이 한동대의 법학자 이국운 교수에 의하여 훌륭하게 번역된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정치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돌아가기 직전의 후배 교수와 여러 번에 걸쳐서 만나 읽고 토론했던 이 책을 번역본으로 읽고 토론했더라면 더 좋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왈저의 다른 책, 『정의와 다원적 평등』(Spheres of Justice)은 10분의 교수님들에 의하여 1998년 번역되었습니다. 왈저의 정의론 논문 한 편을 쓰는데, 이 번역서를 통해 많은 에너지를 절약한 것을 생각하면, 먼저 길을 열어주는 번역자들이 노고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1980년대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며 석사 논문을 쓸 때, 번역서 한 권 없는 상황에서 영역본을 의지하여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지금은 리쾨르에 대한 많은 학자의 강의, 책이 흘러나오니, 우리말로 리쾨르의 사상을 대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도서관에도 리쾨르의 책이 별로 없어, 김홍우 지도교수님, 종교학과의 정진홍 교수님, 그리고 프랑스에서 학위를 하신 변규용 교수님께 원전을 빌려 복사하느라 책을 절반은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새로운 생각을 마주하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약간의 번역을 늘 해야 하는 저로서는,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기초를 제공한 지식의 선구자와 탐험가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무엇보다도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준,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헌신자와 학자들에게 크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랫동안 영어와 한글이 함께 있는 성경을 사용해왔습니다. 우리말로 읽어서 좋고, 또 영어를 읽으면서 의미를 보충해서 좋습니다. 헬라어, 히브리어로 읽는 어려움을 뛰어넘게 해준 번역자에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반역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번역작업에 매달렸던 고마운 분들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목사, KCMUSA 재단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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