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위르겐 몰트만의 정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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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활발한 생산 공장이 프랑스라면, 모더니즘의 핵심 공장은 독일에 산재해 있습니다. 독일어권에서 19세기 이후 니체의 무신론,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공산주의, 그리고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나와 학문 세계의 패러다임을 장악하였습니다.
지성적으로 세계적 선봉에 선 독일 사상계는 그러나 2차대전의 유태인 홀로코스트라는 전쟁범죄와 패전과 분단으로, 심각한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가진 곳이 어떻게 나찌 세력의 온상이 될 수 있었을까? 가상 지성적인 나라가 어떻게 600만 유태인 대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기독교는 히틀러에 대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또 극우 전체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놓은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허용했는가? 비록 본회퍼 목사의 저항이 있었고, 칼 바르트와 고백교회의 목회자의 “바르멘선언”(1934)을 통해 나치 정권을 비판했지만, 왜 대부분 독일교회는 침묵하였는가? 여기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 요구되었습니다.
대전 중 포로가 되었던 위르겐 몰트만(1926-)은 전쟁과 인간의 참상을 몸으로 겪으며 회심하였고, 전후 신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의학(미국의 조직신학) 전문가로 훈련받고 그 방면에 많은 유명한 저술을 남겼지만, 독일의 분할, 동서독의 분열과 민족의 이념적 분단을 보면서 정치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치신학에 대한 관심사는 가톨릭 신학자인 요한 메츠(1928-2019) 신부, 그리고 도로시 죌레(1929-2003) 교수와 교류하며 시너지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함께 학문적으로 칼 슈미트를 대체하는 정치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몰트만과 메츠와 죌레를 중심으로 한 정치신학의 발전은 비로소 칼 슈미트의 원죄와 같은 ‘어용’ 정치신학을 극복하는 비판적 정치신학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히틀러와 아우슈비츠라는 우파전체주의에 이론적으로 대항하는 공헌을 했습니다. 아울러 마르크스주의가 낳은 좌파 전체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며, 세계 경제의 주변부와 제3 세계 국민의 참상에 공감하였습니다. 정치신학의 이러한 시각은 이후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그리고 환경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정의와 자비의 외연을 확장시킵니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1964), 『정신신학 정치윤리』(1984)를 통하여 사회비판의 기능을 가지는 정치신학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몰트만의 『정신신학 정치윤리』를 통한 중요한 천명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집약됩니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정치 비판적 신학.”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통치한다는 신앙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이데올로기로부터 구분한다. 십자가는 참된 신앙을 미신, 불신앙과 우상숭배로부터 구분한다.” “확실히 두드러진 비정치적 신학은 언제나 그들의 침묵을 통해 보수적인 정치운동과 더불어 견고한 동맹을 맺는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그것이 종교적 아편인지 아니면 자유의 실제적 효소(酵素)를 공급하는 것인지 부단히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왕국을 기다리는 대합실이 아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왕국 그 자체도 아니며, 단지 지상으로 내림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전장이요 건축장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정치신학의 출발을 찾고, 정권의 우상화를 해체하려 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신학에서 교회와 세상 질서의 성격을 새로 규정했으며, 종말론적 “희망”을 통하여 시대적 변혁의 동력을 얻었습니다. 예배와 성례전은 그에게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현존이었습니다. 몰트만은 개인과 억압에 갇혀있던 신학을 주의 영 안에서 자유롭게 풀어냈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목사, KCMUS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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