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택 교수의 문학 칼럼] 『노인과 바다』 3. 고독: 홀로 바다에 있으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페이지 정보
본문
바다는 고독의 거울입니다. 산티아고는 홀로 바다로 나아갑니다. 새벽의 물빛은 차갑고, 작은 배는 외롭고, 수평선은 말이 없습니다. 마을도, 소년도, 사람들의 소리도 뒤에 남겨졌습니다. 바다에는 노인과 배와 낚싯줄, 그리고 깊은 침묵만이 흐릅니다. 『노인과 바다』의 고독은 단순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운명과 마주하는 가장 깊은 자리입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삶, 누구도 대신 견뎌 줄 수 없는 고통, 누구도 대신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 앞에 선 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헤밍웨이는 산티아고의 고독을 과장된 감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노인의 외로움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노인을 바다 위에 홀로 세웁니다. 작은 배, 거대한 바다, 팽팽한 줄, 찢어진 손, 긴 밤, 그리고 말 없는 수평선. 그 장면 자체가 고독을 말합니다. 헤밍웨이의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많은 설명이 아니라 견디는 몸입니다. 산티아고의 고독은 철학적 개념이기 전에 손의 통증이고, 허리의 피로이며, 마른 입술의 중얼거림입니다. 그는 홀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홀로 있음 속에서 인간의 내면은 가장 깊이 드러납니다.
산티아고의 고독은 완전한 단절이 아닙니다. 그는 혼자 있지만, 홀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소년 마놀린을 기억합니다.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를 떠올립니다. 거대한 청새치에게 말을 걸고, 새와 바다와 자기 자신에게도 말을 건넵니다. 그의 말은 때로 독백처럼 들리지만, 그 독백 안에는 관계의 흔적이 스며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싸울 때조차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 배웠던 기술, 믿어 왔던 가치, 품어 온 소망과 함께 싸웁니다. 고독은 모든 관계가 사라진 공백이 아니라, 때로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더 선명해지는 깊은 침묵입니다.
산티아고가 반복해서 떠올리는 마음 가운데 하나는 “소년이 있었으면 좋으련만”이라는 바람입니다. 영어 원문으로는 *“I wish I had the boy”*입니다. 이 짧은 문장에는 노인의 외로움만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필요가 담겨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소년에게 의존하는 약한 노인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문장 속에는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는 따뜻한 끈이 있습니다. 마놀린은 산티아고에게 단순한 조수가 아닙니다. 그는 기억이며, 사랑이며, 미래입니다. 노인의 경험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소년은 미래를 말합니다. 산티아고가 바다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마놀린의 존재는 그의 곁에 보이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홀로 결단해야 하는 순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고독은 인간의 조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고립은 인간의 본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관계적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누군가의 손길을 그리워하며, 누군가에게 돌아갈 항구를 필요로 합니다.
이 이야기를 실존적으로 읽으면, 산티아고의 바다는 인간이 홀로 책임져야 하는 세계입니다. 아무도 대신 노를 저어 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대신 낚싯줄을 잡아 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대신 청새치와 싸워 주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그는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그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선택 앞에서도, 양심 앞에서도 인간은 홀로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산티아고의 고독은 그래서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합니다. 그는 도와줄 이 없는 고독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독을 버림받음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광야는 외로운 장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무너졌고, 호렙산의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은 지친 선지자의 고독이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돌봄과 부르심의 자리였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기 전에 먹이시고 쉬게 하십니다. 절망한 인간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쉼이며, 논쟁이 아니라 은혜로운 돌봄입니다.
고독에 신학이 있습니다. 시편 139편은 고독의 신학을 깊이 성찰합니다. 시인은 하늘에 올라가도, 스올에 자리를 펴도,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붙드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외로운 사람에게 던지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안으로 너무 깊이 가라앉아 아무도 자신의 상태를 모를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깊이를 알고 계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버려진 바다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잊힌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와 사회에도 산티아고의 바다를 건너는 이들이 많습니다. 목회자는 강단 위에서는 말하지만, 자기 내면의 두려움은 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교사는 낯선 땅에서 사명을 붙들지만, 마음 한편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외로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수와 지도자는 많은 사람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혼을 돌볼 사람을 찾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가족을 위해 견디지만, 자기 슬픔을 눈물과 함께 조용히 삼킬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살지만, 깊은 곳에서는 혼자 바다를 건넙니다.
신앙 공동체는 이런 고독을 가볍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상처 입은 영혼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사람들도 외로웠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예레미야도, 바울도 고독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고독은 신앙의 실패가 아닙니다. 때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이 가장 정직해지는 자리입니다. 믿음은 외로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두는 것입니다.
고독과 고립은 다릅니다. 고독은 때로 영혼을 깊게 하지만, 고립은 영혼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놀린이 되어야 합니다. 마놀린은 노인의 사투를 대신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노인을 기억합니다. 노인을 존중합니다. 노인이 다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의 존재를 붙들어 줍니다. 신앙 공동체의 사명도 이와 같습니다. 모든 고난을 대신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사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침묵하는 곁에 머물고, 지친 손을 바라보며, 다시 아침을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혼자 바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독 안에는 소년의 기억, 삶의 기술, 자연에 대한 경외, 자기 자신과의 깊은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가장 깊은 고독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홀로 싸워야 합니다. 아무도 대신 감당해 줄 수 없는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아무도 대신 건너 줄 수 없는 밤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결코 홀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고독합니다. 그러나 그 고독은 끝이 아닙니다. 밤바다 위에도 별은 있고, 침묵 가운데도 기억은 있으며, 지친 영혼 곁에도 하나님의 손은 있습니다. 산티아고의 작은 배가 깊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을 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 속에서도 그는 소년을 기억하고, 바다와 대화하며, 자기 영혼을 붙듭니다. 믿음의 사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백합니다. “나는 홀로 바다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나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홀로 있어도,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계속>
임윤택 교수(선교신학자, 미주 장신대학교 선교학 박사원 원장)
- 이전글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26.06.18
- 다음글[은퇴 목사의 칼럼(3)] 1980년대 개척교회, 그 시절의 성미(誠米) 주머니와 첫사랑 26.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