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세상읽기] 뉴욕의 망치와 서울의 펜… Z세대의 ‘아날로그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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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공원. 앳된 Z세대들이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바닥에 던지고 망치와 돌로 산산조각 냈다. "사과는 먹는 것이다(Apples are for eating)!" 광장에 울려 퍼진, 애플 컴퓨터를 조롱하는 외침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사회 고발이었다. 반면, 비슷한 시기 서울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 후미진 골목의 독립서점이나 조용한 북카페에 앉아 두꺼운 종이책을 펼쳤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노트에 쓰고, 이를 사진으로 찍어 SNS에 공유했다.
디지털 과잉이라는 시대적 중병 앞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대비가 흥미롭다. 뉴욕이 '망치'를 들었다면, 한국에서는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미학적인 문화 현상으로 발현됐다.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멋지다는 의미의 '힙'이 결합된 이 신조어는, 활자를 읽고 소비하는 행위 자체를 세련된 자기표현으로 여기는 세태를 뜻한다. 네이티브 스피커인 딸에게 ‘힙’이 뭐냐고 물었더니 ‘쿨’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최근 10년 사이 독립서점이 20배 가까이 늘었다. 짧은 쇼츠 영상에 찌들은 뇌를 구하고자 하는 아날로그의 반격이다. 겉멋으로만 하는 과시적 독서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타임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허영이 영어 공부의 계기가 되듯, 시작이 무엇이든 활자에 머무는 시간은 그 자체로 값지다.
더욱이 텍스트힙 열풍이 ‘필사’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교보문고 손글씨 대회에 무려 7만 5천 명이 몰렸다고 한다.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는 이를 스마트폰이 주도하는 '시각 정보의 독재'에 맞서 손의 촉각이 균형을 맞추려는 '감각의 복권'이라고 진단했다.
필사운동의 주체가 1020의 Z세대라는 점이 특이하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와 한 몸이었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펜을 들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종이와 펜은 원초적인 기록 툴이다. 요즘같은 디지털 시대에 종이와 펜은 불편할 수 있다. 요새 누가 편지를 써서 부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우체통 앞에서 편지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편지를 뜯는 기쁨, 이런 것들이 연애하던 시절의 감동이 아니었을까.
나도 작년 7월부터 성경 디지털 필사운동을 하고 있다. AI시대에 대비하기 위하여 타이핑 연습 겸 성경을 깊이있게 읽자는 운동이다. 그러다가 이번 주부터 타블렛에 손글씨를 써서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물론 액정화면에 글을 쓰는 것이라 종이질감에는 못따라 가지만, 타이핑을 하고 난 후에 쓰는 손글씨는 또 다른 맛이 있다.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정재승 교수의 서평 – “우리가 도달한 현대 문명의 정점, 그 안락한 공간에서 잃어버린 감각과 생존의 본능을 되짚는 여정이다. 알래스카의 거친 바람 속에서, 고요한 산악 사냥 속에서, 이스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온도와 음식, 연결과 안전이라는 틀을 벗고, 오래된 불편함의 가치를 되살린다.” – 을 보고 바로 책을 구입했다.
뉴욕의 요란한 망치질과 서울의 사각거리는 펜 소리는 표현 방식만 다를 뿐, 정확히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편리함이라는 디지털의 환상 뒤에 가려진 인간 본연의 어떤 갈망이다.
요즘, 주말농장에서 텃밭을 분양받듯, 서가 한 칸을 개인에게 임대해주는 공유책방이 뜬다고 한다. 책을 읽고 진열해서 팔기도 하고, 손비누 같은 수제품을 팔기도 하는 모양이다.
아날로그의 반격이 독서와 필사, 공유서점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 누가 Z세대를 철부지라 하는가. 젊은 세대들이 불편함을 참고 디지털 세계의 부작용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면 AI와 공존해야 할 미래가 그리 비관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이재호(유튜브 ‘시니어 밸리 TV’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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