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던지는 자의 실로암] 병촌교회와 66인 순교기념관
페이지 정보
본문
결국 토요일 저녁 서울로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토요일에 청년 시절부터 저를 지도하신 박철수 목사님을 방문하고 담소했습니다. 점심,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며, 화순 근처의 추월산과 죽녹원을 방문했습니다. 결국 이별을 미적거리다가 서울행이 늦어졌습니다. 늦은 밤 겨우 논산까지 올라와 다시 하룻밤을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7월 28일 주일 새벽, 주일예배를 드릴 장소를 정하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병촌성결교회! 66명의 순교자의 터전을 꼭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 곳에는 정말로 귀중한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성영 목사님 부부가 목회하시는 교회는 마침 늦은 맥추감사주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열매”(눅 11:11-19)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정말로 목사님과 교회가 우리 부부에게 감사를 넘치게 했습니다. 성도님은 방문객인 저희를 잔치 자리로 인도하였습니다. 사랑과 관대함이 깃든 점심을 즐겼습니다.
저희 같은 방문객이 많을 터인데, 담임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의 믿음의 유산을 일일이 소개하셨습니다. 황송하게도 우리 부부 두 사람이 앉아 교회의 영상기록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상에서 간증하신 고령의 노미종 권사님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산다고 해서 처음에는 공산당을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시간이 지나며, 공산당은 “기독교인이 사상이 다르므로 죽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잘 가꾸어진 “66인 순교기념관”에 이르러 목사님은 구석, 구석에 전시된 사진과 의미 있는 조각물, 기념비, 조명과 공간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세련되게 가꾸어진 카페에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평화스럽게 이야기하고 휴식하였습니다.
6.25동란 발발 후 3개월간을 점거했던 공산군이 후퇴할 때, 그들은 9월 27, 28일 이틀에 걸쳐 신도 16세대 66명을 잡아다가 고문과 구타를 가했습니다. 이 같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당시 31세의 여집사 정수일은 시부모, 시동생, 아들, 딸, 조카 등 일가족 10명과 함께 기도와 찬송을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공산군은 패전하니 이제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 받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원은 성도들을 죽창, 몽치와 농기구로 때리고 4개의 구덩이에 묻었습니다.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김주옥 장로(당시 집사)는 모친, 아내, 12세 딸과 둘째 아들을 잃었고, 16세, 8세, 6세 되는 질녀를 잃었습니다. 당시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5가정을 비롯하여 교인 총 74명 중 66명을 잃었으니, 교회가 받은 핍박은 얼마나 극심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순교 사건은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김주옥 장로와 잡히기 전 어린 동생을 업고 도망친 김주옥 장로님의 딸 김명호 님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살아남은 교회의 성도들이 공산당 앞잡이로 활동하다가 월북한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을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교우를 죽이는 악행을 저지른 당사자의 가족을 교회의 성도들이 용서하고 함께 교회를 이룬 것은 평범한 수준을 뛰어넘는 “거룩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성영 목사님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면서, 선배들이 겪은 어제의 고난에 대하여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1933년 병촌교회의 전신이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단과 함께 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과 함께 다시 시작된 병촌교회가 5년 만인 1950년 9월, 성도의 약 90%가 순교 당하는 격동을 경험했습니다. 예수의 재림이 가까운 지금, 환란을 이길 수 있는 신앙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스스로 질문하며, 66개의 돌조각으로 세워진 “66인 순교기념탑”을 떠났습니다.
민종기 목사(충현선교교회 원로 목사 및 KCMUSA 이사장)
- 이전글[강준민 목사의 목회서신] 가장 소중하지만 가장 힘든 것이 있습니다! 24.08.08
- 다음글[김영국 목사의 음악목회 이야기] 레위기(Leviticus)의 찬양과 경배 -6 24.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