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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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사님. 반갑습니다. OOO여단 같은 부대에 있었던 박상원입니다.' 얼마 전, 불쑥 날아온 이메일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박상원’이라는 이름은 익숙했지만,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메일의 첨부된 그분의 약력과 사진을 보니 어렴풋이 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똑 부러지게 생겼고, 성실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하던 군대 후임병이었습니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을 때 그가 주중에 교회로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시애틀에 살고 있는데, 저를 만나러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36년 전에 군대 생활을 같이한 사람이 찾아오겠다고 하니 겁부터 덜컥 났습니다. 혹시 제가 그때 그 후임병을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교회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20대 초반의 싱싱하고 늠름하던 군인이 어느덧 60을 바라보는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내무반에서 함께 뒹굴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그가 목사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식사를 함께하면서 그와의 추억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고, 머릿속에서 사라졌던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연대 본부 행정병으로 복무하면서 저는 군수과에 있었고 그는 작전과에 있었는데, 밤새 타자를 치고 차트를 그려야 했던 그는 자주 외근을 나가는 제가 부러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연대 본부가 여단 본부로 바뀌면서 모든 행정적 지원을 하느라 고생했던 기억도 났습니다.
“키도 큰 사람이 항상 옷을 짧게 입고 다녔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잊고 있던 제 모습을 다른 사람의 추억 속에서 발견해 낸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제 후임이었기에 저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한 살이 많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그때 더 잘해줄 걸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부대 옆에 붙어 있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같이 했다는 것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탈출구로 여기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둘 다 신학생도 아니었지만, 철모르고 다니던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고, 결국 목사가 되어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하고 있음을 알고는 서로 감사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교회에서 사역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신학교를 마치고 이민 교회를 섬기다 지금은 북한 동족을 돕는 ‘기드온동족선교회’를 맡아 사역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군대 이야기에서 사역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졌습니다. 그가 만난 목회자들, 그가 다닌 교회 중에서 제가 아는 목사님들과 교회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사역 이야기를 하는데 그의 눈에서 빛이 났습니다. 선교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고 여겨지는 북한 선교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한 신실한 사역자의 간증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지기 전, 그가 제게 책 한 권을 주었습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이라는 제목에 ‘북한 간부의 목숨을 건 하나님 사랑’이라는 부제로 북한에서 간부로 살다 예수를 믿고 탈북한 어느 그리스도인의 간증집이었습니다. 간증의 주인공이었던 북한 간부는 자신의 간증문이 책으로 나오기 수개월 전 그토록 사모하던 천국으로 갔다고 하니, 결국은 그의 유고집이 된 셈입니다.
그 책에는 중국에서 성경책을 구해오다가 총 맞아 죽은 북한 성도의 이야기, 중국에서 어렵게 구해온 성경 한 권을 30여 명이 읽어야 했기에 신구약 66권을 두 권씩 잘라 나눠 가진 이야기, 레위기와 사무엘상 두 권만 읽고도 순교를 각오하고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북한 성도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책을 읽는데 부끄러웠습니다. 우리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목숨을 건 기도와 희생제물이 되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오히려 남한의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죽기를 소망하며 민족의 복음 통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우리는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탈북자로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고난의 삶을 살던 한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간증을 통해 육체적 굶주림보다 더 큰 갈증이 영적 목마름이고, 그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생명의 말씀’뿐이라는 깨우침을 36년 만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창민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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