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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면제부인가? 면벌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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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4-10-18 | 조회조회수 : 6,2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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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가을남자’다. 가을이면 갑자기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교회마다 그의 이름이 울려 퍼진다.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을 ‘9월 성경’이라고 한다. 그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황제에게 된통 얻어맞고 누구에게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위기를 맞았지만 영주 가운데 엄청 힘이 센 프리드리히 3세란 선제후(선제후에 관한 설명은 이번 6면 참조)의 배려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게 되었다. 거기서 고독하고 고립된 시간을 보내면서 이루어낸 위대한 업적이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의 독일어 번역이었다. 그게 1522년 9월 21일 비텐베르크 출판업자에 의해 출간되었다. 9월에 출간되었다 해서 ‘9월 성경’이다.


성경은 종교개혁의 심장과도 같았다. 그때만 해도 성경은 성직자의 전유물이었고 보통 신자들은 성당에 그려진 벽화나 유리창 그림을 보고 그림 동화 보듯이 대충 성경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개혁의 원천이 되는 성경을 민중이 읽어야 된다고 깨달은 루터는 성경번역에 공을 들였다.


루터의 선배 개혁자들인 존 위클리프가 영어로, 얀 후스가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서 루터의 9월성경은 종교개혁의 추진력이 되었고 독일어 발전에 공헌한 점은 지금도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루터가 가을남자인 이유는 또 있다.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던 교황청을 건드리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채교회 정문에 내다 붙인 날이 1517년 10월 31일이다. 그래서 10월 31일을 개신교는 종교개혁일로 지키고 1517년부터 종교개혁 원년으로 계산하여 금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이 되었다. 위에 말한 루터의 위대한 2가지 개혁의 행적이 모두 9월과 10월에 있었다. 그래서 가을남자라는 것이다.


루터하면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란 말이다. 95개 반박문의 골자가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면죄부는 사전적 의미로 따지면 ‘죄과를 사면하여 준 증서’를 말한다. 이 면죄부는 루터시대 이전에도 십자군 전쟁 중에 돈이 바닥이 나자 교황청은 면죄부를 팔아서 충당했던 역사가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교황청은 또 대량으로 면죄부를 발행하여 주교들에게 떠넘겼다. 주교들은 신도들에게 이를 강매하면서 종교개혁의 발단을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놀라운 게 있다. 종교개혁과 이복동생처럼 오르내리는 ‘면죄부’란 말이 이젠 면죄부가 아니라 ‘면벌부’라는 말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한국에서 오래전 교육인적자원부의 명령(?)으로 면죄부는 없어지고 지금은 죄다 면벌부로 바꿨다는 것이다. 중고교 교과서에서 그렇게 바뀐 줄도 모르고 나는 철썩 같이 면죄부만 있는 줄 알았다.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 이시다. 우리에게 연옥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 죄와 벌의 구별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죄와 벌을 한 세트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면벌부란 말을 지지하는 캐톨릭이나 지지파들은 한국어에서 분명 ''죄''와 ''벌''의 의미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고 캐톨릭 교리적으로도 죄와 벌이 분리될 뿐 아니라 용어 자체가 캐톨릭 용어이니만큼 면벌부로 번역하는 게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일부 캐톨릭 교회에서는 아예 면죄부란 말을 없애고 ‘대사(大赦)’란 말로 바꿔야 된다는 주장을 꾸준하게 펼치고 있다. 면죄부의 원어는 라틴어 인둘젠씨아(Indulgentia)로 영어 인덜젠스(Indulgence)의 어원이 되고 있는데 ‘관대, 은사, 후하게 베풀어 줌’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대사’가 적절한 번역이고 면죄부로 번역한 것은 불편한 오역이었다는 주장을 편다.


면죄부 판매는 교황 레오 10세의 ‘작품’인데 지난 507년 동안 10월만 되면 교황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오르내리고 있으니 캐톨릭 교회로서는 종교개혁이란 말이 기분 나쁘고 루터는 더욱 기분 나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루터를 상대로 한 ‘가짜뉴스’는 한 두개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비텐베르크 성채교회에 붙인 95개 반박문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당시 루터가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불과했다는 주장이다. 망치나 못을 들고 옆에서 반박문을 함께 붙였던 조력자도 없었고 오직 루터의 ‘단독 플레이’였기 때문에 그걸 누가 믿을 수 있냐는 것이다. 루터가 죽은 후 지지자들이 쓴 ‘소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냥 해오던 대로 하자. 지금 우리 교회현실이 면죄부, 면벌부로 말다툼 벌일 때는 아니다.


면죄부를 파는 행위자체가 벌 받을 일이요, 그걸 보고 루터가 들고 일어나 진리의 편에 서서 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린 건 천만 다행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그래서 고해성사 거치지 않고 하나님과 직통왕래가 가능하게 된 것도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의 재발견은 종교개혁의 축복가운데 최고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10월엔 ‘가을 남자’ 마르틴 루터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살자. 루터교 신자가 아닐지라도 개신교인이라면 그리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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