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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일기] 내 인생의 마지막 영수증까지 내 손으로 정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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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6-04-20 | 조회조회수 : 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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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과 호스피스 사역의 최전선에서 임종을 맞은 수백 명의 환자와 가족들을 지켜보며, 저는 죽음이 단지 한 사람의 삶의 끝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에게는 한 번에 밀려오는 거대한 현실의 파도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죽음은 다음 생애로 떠나는 이에게는 홀가분하겠지만, 잘못하면 남겨진 자녀들과 가족들에게는 아수라장 같은 충격과 혼란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런 죽음의 현장을 수없이 목격하며 저는 한 가지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나의 마지막 누울 자리와 장례 비용은 내 손으로 미리 정하고 다 지불해 놓고 떠나자."


제가 이토록 저의 장례에 대해 완불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는 제 사역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낀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자녀들에게 닥칠 ‘예상치 못한 경제적 충격’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호스피스 원목으로 임종 직후 가족들과 마주할 때마다 제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의외로 다음과 같습니다: 


“목사님, 이제 뭘 해야 하나요?” 

"장례식장을 정해놓으셨다면 전화를 하시면 됩니다." 


“장례식, 장지, 묘비, 관 비용은 얼마나 드나요?” 

"정하시기 나름이지만 보통 3 만에서 5 만불이 듭니다." 


“당장 돈을 어디서 마련해야 하지요?” 

"죄송합니다, 그건 가족들이 상의해서 감당하셔야 합니다." 


부모님이 바로 눈앞에 누워 계신데도, 자녀들의 어깨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첫 현실은 슬픔을 뛰어넘는 예상하지 못했던 장례 비용입니다. 슬픔의 파도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자녀들과 가족들은 곧바로 ‘비용’과 ‘결정’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냉혹한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애도보다 장례절차 견적서와 온갖 다양한 가격표가 붙은 묘지와 묘비와 관을 선택해야 하는 현실은 너무도 잔인합니다. 미국에서 이러한 전통적인 장례 절차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비용이 듭니다. 부모의 죽음조차 준비되지 않은 자녀들에게 이러한 장례비는 몇 배의 무너짐으로 다가올 경우가 많습니다. 


장례식 없는 직접 화장을 선택하면 2천불 내외로 비용을 줄일 수 있지만, 그것조차 부담스러워 몇 달간 시신 안치소에 모셔 둔 채 지원 절차를 기다리는 사례들도 현장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둘째, 돈 문제로 형제간의 우애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자녀가 둘 이상이면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형편, 가치관, 부모와의 관계, 책임감의 정도에 따라 모두가 다르게 반응합니다. “부모님 마지막 길인데 이것도 못 하느냐.”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 "이런 건 돌아가신 아버지도 좋아하지 않으실거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슬픔 가운데 시작된 대화가 서운함과 분노로 번지는 장면을 저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평생 우애롭게 지내던 형제자매가 부모의 장례를 계기로 멀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생전에 모든 장례 비용을 완납해 두고, 장지와 묘비와 관까지 다 정해놓고 돌아가신 가정은 정말 다릅니다. 자녀들은 재정적인 부담이나 형제 자매간의 갈등보다 애도에 집중하고,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과 감사에 집중합니다.


셋째, 세대와 문화의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에서 자란 요즘 세대에게 부모의 장례는 종종 ‘자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의무’라기보다, 부모가 생전에 미리 정하고 처리해야 할 일로 여깁니다. 이는 효심이 없어서라기보다 세대와 문화적 관점의 차이입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먼저 장례 이야기를 꺼내면 자녀들은 불편해하며 대화를 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부모의 장례 준비는 철저하게 부모가 감당해야 할 일로 여기는 자녀들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의 장례를 준비해 두는 것이야말로 자녀를 위한 성숙한 배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절한 때에 부부가 본인들의 장례 준비를 마치고, 유산 정리와 법적 문서까지 잘 정돈해 둔다면 그것은 자녀들을 향한 가장 깔끔한 사랑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 나이도 쉰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10여 년 후면 은퇴를 하게 되는데 그 무렵에는 아내와 손을 잡고 우리가 누울 마지막 자리를 정하고 장례비용도 다 지불해 놓으려 합니다. 물론 10 만불짜리 장례 보험을 들어놓는 것도 한 방법이기는 합니다만, 최소한 묘자리와 묘비, 관 등은 예약을 마쳐야 하겠지요.  


이렇게 자신의 장례를 준비해 놓는다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을 꽉꽉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풍성히 살아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떠난 자리에서 갈등 대신 화목이, 원망 대신 감사가 남기를 바라는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영수증까지 내 손으로 정리해 두는 것. 그것이 내가 평생 사랑한 자녀들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마지막 선물이라 저는 믿습니다.


신동수 목사(병원/호스피스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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